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4-09-05 11:45:54
기사수정

천태종은 중국 천태산의 이름을 따서 만든 종파로, 중국 진나라 말과 수나라 초의 유일한 고승 ‘자자대사’에 의해 천태종을 개창했고, 고려시대 문종의 넷째 왕자로 태어나 11세에 출가해 47세 입적할 때까지 오직 구법과 전등을 발원한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오게 됐다.

이후 조선의 숭유억불정책으로 은몰해 있던 천태종을 중창한 ‘상월 대각국사’가 불교 중흥과 중생구제에 진력하면서 1945년 소백산 연화지에 초암(현 구인사)를 짓고 천태지관으로 수행정진에 진력하면서 회삼귀일, 원융삼제, 진속불이의 법화교지로써 새불교운동을 전개키 위해 단절된 종맥을 계승, 천태종을 중창했다.

천태종을 중창한 ‘상월 원각대조사’는 칡덩굴을 얽어 만든 산가초암을 짓고 뼈를 깎는 정진 끝에 대도를 성취 감로법우의 새 교화문을 열어 그 미묘한 법력과 도풍덕화를 쫓아 수많은 문법제자들이 그를 산부처라 부르면서 운집하기 시작해, 현재 250만 성도가 찾는 사찰이 됐고, 말사도 생겼다.

# 도정스님이 구인사에 출가 동기

도정스님이 출가하게 된 계기에 대해 “당시 부모님이 구인사에 다니셨는데 (제가) 중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부모님과 함께 구인사에 와서 설법을 들었는데 깊은 감명을 받았어요. 대중설법을 하시다가 제자 3분이 릴레이 방식으로 설법을 하셨는데 정말 신통방통했고 경이로운 마음마저 들었다. ‘나도 하면 될까’라는 생각으로 출가하게 됐다” 말씀하셨다.

이어 “부모님은 재산이 많은 분들이었는데, (제가) 출가를 하면서 전 재산을 종단에 기부했다. 그리고 1968년 구인사로 출가했을 당시에는 첫 출발하는 시점이라 불교의식이 제대로 갖춰져 있지도 않았고, 또 제대로 배울 수 도 없었었고 길도 없었고, 식생활 해결도 큰 문제였다”면서, “당시 초가집을 포함해 3-4채 정도 있었어요. 이후 지금의 집과 도량을 비롯해 박물관을 건축하게 됐지요.”라고 회고했다.

# ‘주경야선’으로 일궈낸 ‘구인사’

도정스님은 “손수 산비탈을 깎아 길을 만들고 조금씩 법당을 지어가면서 상상하지 못할 환경 속에서 오늘을 만들었지요.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정신수행으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갖추는 ‘주경야선’을 통해 의식주의 해결과 함께 교육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됐다”면서, “천태종은 결집력이 가장 좋은 종단으로 한국불교를 대표할 수 있지만 짧은 역사 속에서 오늘까지 만들어진 일들이 엊그제 같은데 과거를 돌아보면 ‘세월이 무상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고 밝혔다.

하지만 도정스님의 구인사를 이루는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겨울에 나무를 하러갔는데 부자집에서 자라서 나무를 한 경험이 없었지요. 다른 사람들과 같이 나무를 했는데 하나도 하지 못해 그냥 빈 지게로 내려온 일이 한 두 번이 아니었어요. 또 돌을 깎아 길을 만들고, 수레를 한 번씩 움직여야 하는데 힘에 부쳐 넘어지기도 수 없이 많았지요. 한번은 수레를 밀고 내려오다 언덕에 쳐박혔는데 마을 사람들이 수레가 망가지는 일만 걱정했지 (저를) 걱정해주지 않아 화가 나 산을 내려가려고도 했지요, 그때 큰 스님께서 아시고 격려해 주시는 말씀에 힘을 얻고 지금까지 잊을 수 없었지요. 어려울 때마다 큰 스님의 미래에 대한 꿈과 격려가 지금까지 견디어 올수 있었던 버팀목이 됐다. 당시 큰 스님께서 말씀하셨던 꿈이 현실로 이뤄진 것이 놀랍기도 하고 신기했다”면서 환하게 웃으셨다.

천태종이 가야할 3대 지표는, 대각국사에 의해 개립됐던 고려 천태종은 역사의 비운속에 자취를 감췄다가 상월 원각대사에 의해 다시 빛을 드러낸 천태종은, 일제의 암흑시대가 종말을 고한 8.15 광복 후 국토양단 민족분열의 액운으로 인해 6.25 동족상잔의 비극을 거쳐 오게 된 민족적 수난을 크게 개탄하고 불교 중흥과 호국제중의 대원을 세웠다.

이를 위해 애국불교, 생활불교, 대중불교를 3대 지표로 세웠다. 우선 일제 시대에 이리 저리 쫓겨다니면서 나라 없는 설움을 겪은 상월 원각대조사는 “나라 없이는 종교는 없구나”하는 생각 속에 항상 나라를 사랑하는 ‘애국불교’를 주창했다.

이어 과거 시찰하면서 생각하는 잡소리 세속의 소리가 없는 산중에 사찰을 지어 생활하는 산중불교에서 벗어나 생활 속에서 어울려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생활불교로 지표로 내세운 ‘생활불교’,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닌 더불어 모든 사람이 같이 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 생활 대중과 함께 살 수 있는 새불교인 실천불교를 지향하는 ‘대중 불교’를 말한다.

# 사회를 던지는 메시지

도정스님은 오늘을 사는 현세대에게 “경제와 의식의 생각에 차이가 있다”면서, “60-70년대는 경제는 어렵지만 마음, 인심은 후덕하게 이해하고 협조하면서 살아왔는데, 경제가 갑작스레 성장하다보니 모든 면에서 이기적으로 변했다. 공격성을 띠고 혼돈한 세상이 된 것이 아닌가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이어 “윤리 양심은 경제가 갑작스레 성장하면서 모든 것이 망가졌다”고 지적하고, “살면서 인간의 근본적인 인간성을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교육하고 정서적인 훈련으로 인간이 지켜야 될 인간성이 있는 세상이 돼야 하고, 소통을 위해서는 서로 살아야 하는 상생이 이뤄져야 한다. 그것을 위해 남을 이해하고 배려를 할 줄 알아야 하고, 남을 깔보면서 살아서는 안된다”고 덧붙였다.

또 “상대방에 대한 이해와 존경, 그리고 협력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 갈 때 행복해지고 국가가 행복해진다. 나 자신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협조와 양보 등을 통해 이뤄야 생각한다”고 강조했다.

도정스님은 “이 정도 만들어놨다는 자부심 수행을 통해 견디면서 어느 정도 알 수 있는 눈을 떳다고 생각한다”면서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한편, 도정스님은 서울, 인천 등 총무원 서기부터 시작해 총무부장, 종회의장, 총무원장 등을 역임했다.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할용해주세요.

http://www.hangg.co.kr/news/view.php?idx=15646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리스트페이지_R001
최신뉴스더보기
리스트페이지_R002
리스트페이지_R003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