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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2-24 23:24:00
  • 수정 2018-01-18 10:0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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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곤 기자]보길도로 가는 길은 조선시대 가사문학을 대표하는 고산 윤선도를 만나러 가는 여정이다. 병자호란의 치욕에 좌절과 울분을 품고 제주도를 향하다 발견한 이상향의 섬이 보길도였다. 13년간 머무르면서 세연정, 곡수당, 동천석실 등을 짓고, ‘어부사시사’ 같은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속세와 인연을 끊은 채 자연을 벗 삼아 풍류를 즐겼던 고산 윤선도의 흔적을 천천히 만나보자.<편집자 주>

보길도는 고산 윤선도의 섬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산 윤선도는 조선 선조 때인 1587년에 태어나 현종 때인 1671년 85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효종의 스승이기도 하면서, 서인과의 격한 당쟁으로 20년이 넘는 유배생활을 했다.

한양에서 태어나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밟으면서 남인 최고의 반열에 올랐던 윤선도가 멀고 먼 보길도까지 찾아든 이유는 뭘까?

1637년 병자호란으로 조선 인조는 삼전도에서 삼배구고두라는 치욕적인 의식을 치르면서 항복한다. 이 일이 있기 전 윤선도는 가노를 이끌고 한양으로 향하다가 왕이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기 위해 제주도로 가지만, 제주도로 가던 도중 빼어난 자연환경에 반해 발을 디딘 곳이 보길도다.

윤선도는 보길도에 13년을 머무르면서 격자봉 아래 부용동이라 이름을 짓고 원림을 조성했다. 연못을 파고 세연정을 지어 연못에서는 뱃놀이를 즐기고, 세연정에서 시와 풍류를 즐겼다. 윤선도가 머물던 낙서재, 사람들과 함께 보길도의 자연을 내려다보면서 교유했던 동천석실 등도 윤선도가 남긴 흔적이다. 윤선도가 보길도에 남긴 흔적은 보길도 윤선도 원림으로 명승 제34호로 지정돼 있다.

윤선도 원림 가운데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은 세연정으로, 윤선도의 놀이 공간으로 생각하면 쉽다. 격자봉에서 발원해 흐르는 물줄기를 돌을 쌓아 막고 연못을 만들고 그 물을 끌어들여 네모진 인공연못인 회수담을 만들었다. 두 연못 사이에는 인공섬을 만들어 그 위에 세연정을 지었다.

세연정에 오르면 자연과 인위적인 풍경이 대비가 되면서도 잘 어우러진다. 세연정 동쪽에는 동대와 서대의 단을 쌓고 그 위에서는 춤을 추고 악기를 연주했다고 전한다. 연못에는 배를 띄워 풍류의 절정을 이뤘다. 과연 윤선도의 삶은 은둔자의 삶이었을까? 아니면 풍류를 실천한 자연인이었을까?

[TIP]윤선도의 정적, 송시열의 흔적이 보길도에?

윤선도와 송시열은 각각 남인과 서인으로 치열한 당쟁을 벌인 정적관계였다. 보길도가 윤선도의 섬이지만, 정적이었던 송시열의 마지막 발걸음과 흔적이 남은 곳이기도 하다. 송시열은 장희빈 아들(훗날 경종)을 세자로 책봉하려는 움직임에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렸다가 제주로 유배됐다. 제주도로 유배를 가는 도중 보길도에 들렀는데, 80세 노구였던 그는 회한의 글을 섬 기암절벽 한켠에 남겼는데 그곳은 송시열의 글씐바위다./글.사진-한국관광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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