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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2-25 20:2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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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예술의전당

[오재곤 기자]예술의전당(사장 고학찬)은 이달 22일부터 내년 2월 4일까지 서울서예박물관에서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20세기 서화미술거장1 ‘김종영 - 붓으로 조각하다 Kimchongyung Sculpture with a Brush’展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예술의전당과 김종영미술관이 공동으로 주최하는 전시로, 한국 추상조각의 선구자로 불리는 ‘우성 김종영’의 폭 넓은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고, 김종영의 조각 작품 외에도 서화, 서예, 드로잉, 사진과 유품 등 180여 점이 전시될 예정이다.

특히 김종영이 애장했던 추사 김정희의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을 전시한다. 이 서첩은 본 전시에서 최초로 공개된다. 오는 29일 오후 1시 30분 ‘김종영과 자코메티 - 동서 현대조각의 대화’를 주제로 포럼이, 내년 1월 13일 오전 10시 30분에는 김종영의 예술세계를 재평가하는 학술대회가 개최된다.

지난 1988년 문을 연 예술의전당 서울서예박물관은 2년의 리모델링 과정을 거쳐 2016년 3월 1일 재개관 후, ‘서(書)’를 키워드로 현대미술을 관통하고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 세계 필묵(筆墨)공동체의 구심점을 지향하고 있다.

또 ‘20세기 서화미술거장전’ 시리즈는 정보통신이 주도하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인간적인 예술인 서예의 현재와 미래 방향을 모색키 위한 전시이다. 지난 식민지 서구화로 대변되는 20세기는 ‘서화(書畵)’에서 미술로 넘어가는 전환기였던 만큼, 한국 미술계에는 전통과 현대, 동서 문화가 뒤바뀌는 대 변혁기에 걸맞은 역할을 감당할 인물이 절실했다.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이번 시리즈는 서화와 미술 모두에 정통하여 상호 비교분석하고 융합해 세계 속의 한국미술을 창달하는 데 이바지할 작가를 찾아 그 예술세계를 재조명하는데 그 의의가 있다.

‘한국 현대 추상조각의 아버지’로 불리는 우성 김종영은 사실 전통 서예와 서화에서도 큰 업적을 남겼다. 이와 함께 우리는 김종영의 조각언어를 ‘전통과 현대의 일치’ 또는 ‘내재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의 통합’이라는 결정적인 해독의 키워드로 온전하게 읽어낼 필요가 있다.

김종영 예술 위업의 진정한 가치는 20세기 서화(書畵)에서 미술로의 대전환기에 ‘사의(寫意)’라는 동양전통으로 ‘추상(抽象)’이라는 서구현대를 녹여내면서 동서예술의 나아갈 방향을 실천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는 김종영의 조각이 서예나 문인화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고, 더 나아가서는 그의 ‘불각(不刻)’이라는 조각언어가 철저히 일상생활 속 통찰과 비판적 해석에서 탄생된 것에 주안점을 두고 총 6개의 테마로 전시를 구성했다.

첫 번째 섹션 <창작산실 ‘불각재不刻齋’>는 김종영 예술세계의 정수를 한 눈에 살펴 볼 수 있는 공간이다. ‘불각재不刻齋’는 김종영이 자신의 작업실 편액을 염두에 두고 쓴 작품으로, 깎아 형상을 만드는 것이 업인 조각가가 자신의 작업실을 불각, 즉 ‘깎지 않는 곳’이라고 했으나 일종의 모순이다.

김종영은 자신의 서예작품에 낙관할 때 ‘불각도인不刻道人’이라고도 하고, ‘각도인刻道人’이라고도했다,. 년도를 확인 할 수 있는 작품 중에 각도인이라 낙관한 작품은 1949년부터 찾아볼 수 있다. 반면, 불각도인은 1974년부터로,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그는 역설을 추구하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는 ‘不刻의 美’라는 글을 남기기도 했다.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이 글을 살펴보면 1964년 경 그는 고대 중국인들이 ‘불각의 미’를 숭상한 이유가 인위적인 것을 최소화 한 자연스러움의 미를 추구한 것과 함께 형체보다도 뜻을 중히 여겼기 때문이라고 했다. 결국 자연스럽고 단순한 ‘불각의 미’는 ‘졸박(拙朴)의 미’와도 일맥상통하다. ‘졸박’의 의미가 ‘꾸밈이 없고 자연스러우며, 지혜를 써서 꾸미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졸박의 미’는 조선의 선비들이 추구했던 미학이다.

김종영이 선비의 미학에 입각한 조각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으로, 불각의 미를 추구한 김종영은 복잡하고 정교한 기법을 싫어했다. 그 이유는 숙달된 특유의 기법이 자신의 예술 활동에 꼭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그는 가능한 단순한 표현과 기법을 추구했고, 자신의 지향점을 ‘표현은 단순하게, 내용은 풍부하게’라고 매우 함축적으로 정리했다.

두 번째 섹션은 ‘초월을 잉태하다’[전통체득 시기 : 1915(1세)~29(15세) / 창원]로,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동요 ‘고향의 봄’에 나오는 ‘꽃 대궐’이 바로 경남 창원 소답동에 위치한 김종영의 생가이다. 김종영은 증조부와 조부 모두 정3품 벼슬을 지낸 영남명문사대부집안의 23대 장손으로 태어났다. 그의 7대조가 무오사화(1498) 때 화를 입은 영남사림의 영수 탁영(濯纓) 김일손이다. 한편 부친은 일제강점기였기에 일생을 향리에서 처서로 지냈다.

현재 생가로 알려진 본가 옆에 ’사미루(四美樓)‘ 별채가 있다. 본가와 별채는 1926년 김종영이 11살 때 상량했고 본가는 1940년 지금의 자리로 이건한 것이다. 별채를 ’사미루‘라 하는 이유는 문간채 2층 처마에 건 현판이 석촌 윤용구가 쓴 사미루이기 때문으로, 그의 증조부 김영규는 별채를 짓고 구문(求文)이라 편액했다. 1928년 그는 구문정의 주인으로 시를 지어 원운(原韻)으로 해 각지의 문사들에게 차운(次韻)한 시를 받아 판각해 구문정에 걸어놓았다.

구문정 기문은 규장각 부제학을 지낸 정만조가 지었다. 김종영은 ‘선서(善書)이며 학예장(學藝長)’, 즉 글씨를 잘 쓰고 학예에 능했던 부친의 교육과 함께 이런 시회(詩會)와 여러 문사들과의 교류를 지켜보면서자랐다. 그는 당시 조선 사대부의 학예 전통을 가풍으로 익히게 된 것이다. 한마디로 김종영은 당시 여느 미술학도와 달리 조선 사대부의 고급문화를 어릴 적부터 체화한 것이다.

사진제공/예술의전당

세 번째 섹션 ‘너를 찾아서 [현대수용 시기: 1930(16세)~47(33세) / 휘문고보-동경예대]이다. 김종영의 집안내력으로 볼 때 그가 조각을 선택한 것은 의외일 수 있다. 그가 조각을 전공한 계기는 휘문고보시절 은사인 장발의 인도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그의 친구 박갑성에 의하면 김종영이 조각을 선택한 이유는 조각전통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우리이기에 식민시절 서구미술을 객관적으로 수용하기 위한 것이라고 추측한다.

한편 김종영이 선비가 갖춰야 할 수준 높은 학예(學藝)를 가학(家學)으로 익혀 체화했기에 그가 서양미술을 전공하면서도 이해하고 수용하는 폭이 동년배 미술인들과는 다를 수밖에 없었다. 당시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서는 국내 미술대학이 없는 관계로 일본 유학은 필수였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 미술을 전공한 사람들은 대부분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었다. 하지만 명문사대부 집안 출신은 김종영 이외에 찾아보기가 어렵다. 당시 대부분의 미술전공자들이 개화론자의 입장과 유사하게 전통 서화를 비하했다. 심지어 이한복과 같은 동양화가들은 서예와 사군자는 소인(素人), 즉 비전문가가 하는 것이니 조선미술전람회에서 퇴출시켜야 한다고 총독부에 청원했고, 실제로 퇴출됐다.

그때 김종영은 휘문고보 2학년으로 동아일보사가 주최한 제3회 전조선학생미술전람회 습자(서예)부분에서 전국 장원을 했다. 그는 당시 수상 인터뷰에서 수상하기까지는 부친의 지도가 있었음을 밝혔다. 부친의 한학과 서예에 대한 지도는 김종영이 서양 미술 조각을 전공키 위해 동경에 유학하던 때에도 지속됐다. 특히 당시 부자간에 주고받은 서신을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고, 그 내용을 통해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김종영은 서화에 대한 정수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미술을 서예에 ‘격의(格義)’해 주체적으로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동경유학시절 오로지 인체를 똑같이 만드는 것에 열심인 학교분위기에 불만족스러웠던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불만이 그의 작업에서 왜색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근본 원인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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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번째 섹션은 ‘동서예술 통찰과 추상미술[실험시기: 1948(34세)~1963(49) / 서울대]’이다. 1955년 11월에 쓴 그의 단상을 보면 소박한 듯하지만, 당시 시대 상황을 고려했을 때 그는 대단히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작가로서 그의 태도는 남달랐다. 대등한 입장에서 동서미술을 통찰해 상호 부족한 점을 보완, 혼융키 위해 노력했다.

어려서부터 체화된 서예의 학습방법인 임서(臨書)를 토대로 서구 미술을 연구했다. 당시 작업실이 없어 방학이면 학생들과 같이 빈 실기실에서 작업하면서도 그는 외국작가의 작품집을 펼쳐놓고 깊이 관찰하며 세밀하게 따라 제작했다. 이와 함께 김종영은 서구추상미술의 태동과 그간의 흐름을 스스로 연구하면서 대표적인 작가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간략히 평하며 정리하는 것도 병행했다. 주목할 것은 그는 그런 흐름을 서화의 전통과 비교 성찰하는 것을 병행했다는 점으로, 그는 평론가의 여하한 비평에 대해서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용기와 소신을 가지고 자신만의 일정에 맞춰 작업에 정진해 나갔다.

다섯 번 째 섹션은 ‘역사와 실존의 대화’로, 1964년 1월 1일 일기에 김종영은 “지금까지의 제작생활을 실험과정이었다고 하면 이제부터는 종합을 해야 할 것이다”라고 적었다. 50이라는 나이에 본격적으로 자신의 작업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한 것이다. 이후 환갑을 바라볼 즈음 조각가 김종영은 다시 서화(書畫)로 회귀해 자신을 성찰했다. 김종영이 생전에 추사 김정희를 자신의 사표로 삼았기에 추사고택을 찾아 영전에 절을 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사진제공/예술의전당

특히 김종영은 생전에 ‘완당집고첩(阮堂執古帖)’을 애장해 즐겨 감상했다. 이 서첩 첫 장은 ‘유희삼매(遊戱三昧)’로 시작한다. 그 다음은 고인개집고(古人皆執古) 불사동아비(不辭凍餓悲), 즉 ‘옛 사람은 모두 옛 도를 지키면서 추위와 배고픔을 마다하지 않았네’라고 시작하는 오언절구 시이다. 김종영이 ‘유희삼매(遊戱三昧)’를 예서로 쓰고, ‘세한도’를 그리고 ‘유희삼매’와 ‘완당과 세잔느’라는 제목의 단상을 쓴 것이 이 서첩을 즐겨 감상한 결과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종영은 고희동과 여타 1920년대 미술인들이 힐난한 서화가들의 행태, 즉 옛 것을 그저 베끼기만 하는 것으로 오인된 방작과 임서를 묵묵히 시행했다. 안진경의 ‘쟁자위고(爭座位稿)’를 임서했고,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를 방작했다. 40여 년 전 임서했고, 사생해봤기 때문에 안진경과 만폭동은 김종영에게 매우 익숙한 대상이다. 환갑을 바라보는 김종영이 임서와 방작을 했다는 것은 모든 서화가가 지향하는 ‘입고출신(入古出新)’하기 위해서는 대가일지라도 반드시 지속적으로 해야 하는 학습법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으로, 출신(出新)한 작업들이 ‘북한산’과 같은 드로잉작업이다.

끝으로 여섯 번 째 섹션은 ‘생명의 근원에서[완성기: 1964(50세)~82(68세) / 삼선동]’ 이다. 추사를 사표로 삼은 김종영이 ‘입고출신(入古出新)’해 궁극으로 지향했던 바는 ‘유희삼매(遊戱三昧)’의 경지에 도달해 느낄 수 있는 자유였다. 그래서 그는 “작가에게 작업하는 시간이 쉬는 시간이고, 손을 쉬는 시간은 온갖 잡생각을 해야 하고 생활을 고민해야 하는 괴로운 시간”이라면서, “유희란 것이 아무 목적 없이 순수한 즐거움과 무엇에 구애받지 않는 자유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다분히 예술의 바탕과 상통된다고 보겠다. 동서고금을 통하여 위대한 예술적 업적을 남긴 사람들은 모두 ‘헛된 노력’에 일생을 바친 사람들이다. 현실적인 이해를 떠난 일에 몰두할 수 있는 유희적 태도를 가질 수 있는 마음의 여유 없이는 예술의 진전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예술가로서 김종영의 삶은 동양과 서양을 혈연관통(豁然貫通)해 진정한 ‘입어유법(入於有法) 출어무법(出於無法) 아용아법(我用我法)’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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