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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7-12-26 03:4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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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재곤 기자]중국 베이징대학 역사, 철학, 문학, 고고학 등의 학과에서 각자의 연구영역을 전공한 36인의 내로라하는 석학들이 집필하고, 베이징대학 국학연구원이 학제 간 융합 연구의 학술 저작으로 5년에 걸쳐 편찬한 ‘中華文明史’전4권, 베이징대학출판부 刊)가 3년여의 번역과 편집 작업을 거쳐 지난 11월 한국어판 ‘중화문명사’(전8권, 동국대학교출판부 刊)로 출간됐다.

문명사는 인류의 창조사이자 인류의 발전사라는 관점을 표방하면서, 물질문명.정치문명.정신문명을 각각 사람과 자연의 관계, 인류사회의 조직 방식, 사람의 정신세계에 대응시켜 그 복잡다단한 관계를 총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 책은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중국 문명사를 본격적으로 다룬 방대한 분량의 번역서이다.

세계 4대 문명인 이집트문명, 메소포타미아문명, 인더스문명, 황하문명 가운데 유일하게 중단된 적이 없는 문명은 황하문명, 즉 중화문명뿐이다. 현재 중국에 사는 사람들은 황하문명을 만든 이들의 후예이고, 이 지역 역시 동일한 문명이 진보.발전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화문명은 발전 과정에 있어 중단되거나 분열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질적인 문화 요소를 자신들의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변형시켜 받아들임으로써 독자적인 문명을 유지하고 있다.

이렇듯 세계 4대 문명의 나머지 세 문명을 포함한 수많은 문명이 명멸해 간 수천 년 동안 중화문명이 건재할 수 있었던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지역적으로 규모가 크고 광대했기 때문에 강한 외부세력의 침략이나 전쟁으로 인한 충격이 가해지더라도 그 충격을 흡수하기가 용이했고, 국지적인 자연재해가 발생하더라도 완전히 훼멸되지 않고 문명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내부적으로는 조상숭배 풍습 또한 중화문명이 부단히 지속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조상을 신으로 섬기는 행위, 즉 제사는 후손들을 보호하겠다는 의지의 다른 표현이다. 이러한 혈연을 유대로 한 관계는 문명을 보호하고 체계화하는 역할을 했다.

다음으로는, 한자의 역할을 들 수 있다. 한자의 독특한 형상, 표의表意 등의 기능은 각 지역에서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을 하나로 만들면서 중국 민족의 응집력을 증가시켰고, 그 결과 중화문명이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했다.

물론, 한 문명이 수천 년을 이어 오기 위해선 이 외에도 정치, 경제, 과학기술, 문학, 철학, 예술 등등의 모든 방면에서 너무나 많은 요소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기에 ‘中華文明史’의 집필자들은 그 많은 요소들을 이 책에 담기 위해 끊임없이 토론하고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을 거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 많은 요소들이 어떤 유기적인 관계 속에서 발전해 왔는가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은 권력 중심과 그 주변 엘리트들만의 이야기에 머물지 않는다. 오래전 중국 하층 민중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인류의 보편적 가치는 어떻게 실현돼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하고, 2천 년 이상 지속된 봉건 전제제도를 바닥에서부터 뒤집은 1911년의 신해혁명이 군주제를 타파하는 데 그치지 않고 다른 민족(만주족)까지를 포용하는, 각 민족에 대해 평등한 근대적 민족이념을 품고 있었음도 새삼 살피게 한다.

# 중화문명의 스펙트럼은 상상 이상으로 넓고도 깊다. 그 광대한 문명사를 믿기지 않을 만큼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

일반적으로 통사通史의 서술 방식은 정치사에 편중돼 있기 마련이지만, 문명사는 정치 외에 물질과 정신문명까지를 포괄하고 있기 때문에 그 서술 방식 또한 일반적인 통사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문명사의 서술은 문명의 여러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고찰하고, 문명 발전의 전체 모습을 단계적으로 구분할 수 있는 특징들을 따라가야 하는데, 문명이 포괄하는 범위는 매우 넓기 때문에 반드시 핵심 내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여기서 핵심 내용이란 곧 다른 시기와 구분되는 대표적인 문명의 성과를 말한다. 이를 이해 집필자들은 ‘中華文明史’를 집필하면서 전체성과 대표성을 결합해 문명사를 시대적으로 구분했고, 이러한 원칙에 따라 중화문명사를 네 시기로 구분했다.

제1기: 선진先秦(기원전 2세기 이전)
제1단계: 선하先夏(하나라 이전)
제2단계: 하상주夏商周
제2기: 진한위진남북조秦漢魏晉南北朝(기원전 2세기-7세기)
제1단계: 진한秦漢
제2단계: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제3기: 수당隋唐부터 명대明代 전반기(7세기-16세기)
제1단계: 수당오대隋唐五代
제2단계: 송원宋元부터 명대 전반기(정덕제正德帝 말기)
제4기: 명대 중엽부터 신해혁명辛亥革命(16세기-20세기)
제1단계: 명대 중엽(가정제嘉靖帝 초기)부터 아편전쟁阿片戰爭
제2단계: 아편전쟁부터 신해혁명

‘中華文明史’ 원서에서는 이렇게 구분된 네 시기를 각각 한 권의 책으로 묶어 전4권으로 완성했으나, 한국어판을 출간하는 과정에서는 문자의 특성상 중국어를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분량이 상당히 늘어난다는 점과 한국 독자들의 가독성을 감안해 원서 각 권을 상, 하로 나눠 총 여덟 권으로 출판했다. ‘중화문명사’(전8권) 각 권의 내용을 간단히 소개한다.

제1권 上.下 선진先秦 시기

제1권은 중국에서 황하문명의 성립부터 진秦나라가 전국을 통일하는 기원전 221년까지의 시기를 대상으로 하고 있다. 중국에는 대략 200만 년 전에 이미 인류가 정착해 살고 있었고, 그때부터 발전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1만여 년 전에 발생한 농업으로부터 경제 문화는 빠르게 발전했고, 대략 5천 년 전에 문명의 서광이 출현하면서 오래지 않아 하.상.주 삼대 문명이 탄생하게 됐다. 따라서 중화문명은 그 기원이 매우 오래됐고 세계사적으로 단절되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있는 문명 중의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는 고대 중국 사회질서의 변동이 가장 극심했던 시기이다. 경제생활에서 정치구조까지, 그리고 사람들의 조직에서 사상 문화까지에서 모두 거대한 변화가 발생하였다. “사직은 항상 받들 수 없고, 군주와 신하는 항상 그 지위를 누리는 것이 아니다.(社稷無常奉, 君臣無常位.)”라고 한 『좌전』 「소공昭公 32년」의 기록처럼, 두드러진 점은 정치구조가 항상 일정하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예악의 붕괴’는 사회질서가 사라지는 것을 의미하고, 이를 “천하에 도가 없다.(天下無道)”라고도 했는데, 이는 당시 사람들의 화제였다. 이 시기는 혼란의 시대였지만, 그러나 이 혼란의 와중에도 새로운 문명의 기운은 나타나고 있었다. 사상 문화의 관점에서 사인士人과 사학私學의 흥기는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만한 현상이다. 이들은 고대 사상사의 백가쟁명百家爭鳴 국면을 조성하였고, 이후 수천 년간 사상의 발전 기반을 제공하였다.― 제1권 下, 253쪽.

하.상.주 삼대는 중화문명 발전의 상고上古 시기이고, 중화문명은 물질.제도·정신 등 여러 방면에서 많은 발전이 있었다. 그 기본적 특징은 이 시기에 이미 형성됐다. 중화문명은 삼대 문명을 중심으로 주변의 여러 청동문화가 결합해 다원일체多元一體의 구조가 확립됐다. 춘추전국시대는 청동시대에서 철기시대로 바뀌는 시기로 사회와 정치 체제에 있어서 많은 변화가 발생한 시기였다. 또한 문화가 발전하고 학술사상과 관련된 활동, 특히 공자.맹자.노자.장자 등 뛰어난 사상가들이 출현해 활발히 활동하던 시기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문화적 성취는 이후 중화문명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문명사에도 거대한 공헌을 했다.

제2권 上.下 진.한-위진남북조

제2권에서 기술하는 역사적 기간은, 진시황秦始皇이 진秦 왕조를 세운 B.C. 221년부터 시작해 서한西漢, 동한東漢, 삼국三國, 양진兩晉과 16국·남북조 시대를 거쳐서 수隋나라가 건립된 581년까지로서 대략 800년 정도이다.

이 시기 역사는 대략 중간 정도를 기준으로 두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 400년은 진.서한·동한 시기로,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은 정치적으로 대통일의 시대였다는 점이다. 이때는 중화문명사에 있어서 주요한 특징으로 선진 시기에 이미 출현한 모든 문명적인 요소를 결집해 한층 승화되고, 크게 빛내고, 공고히 하고, 발전시켰다.

후반부 400년은 삼국 시기와 양진.16국.남북조 시기로, 이 시기의 주요 특징은 정치적으로 분열돼 각기 지역을 차지하고 어지러이 싸우는 형국이 그치지 않았다. 중화문명사에서 파괴와 공헌이 함께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 파괴됐다는 점은 잘 알려져 있다시피, 주로 사회가 어지러이 들끓었고, 경제가 피폐해지고, 사람들이 이리저리 흩어졌다는 것이다. 이 시기가 공헌했다는 점은 주로 북쪽 지역과 서쪽 지역으로부터 황하 유역으로 진입해 들어온 소수민족들이 중원 왕조에서 실행됐던 정치 제도와 한 문화를 위주로 하는 선진 문명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는 점이다. 따라서 진한秦漢 대 이래 두 번째로 민족의 대융합이 촉진되던 때였다. 이후로 중원 지역에 수.당과 같이 크게 발전한 대제국이 나타났고, 주변 민족들의 문명도 더불어서 점차 발전해 나갈 수 있게 됐었다.

제3권 上.下 수.당-명 전반기

제3권에서 다루는 시기는 수隋나라의 건국(581)부터 당唐, 송宋, 요遼, 금金, 원元을 거쳐 명明 중엽 정덕 말년(1521)까지로 모두 900여 년에 이른다. 수나라는 건국한 지 8년 후인 589년 진陳을 멸망시키고 전국을 통일했다. 이는 영가永嘉의 난亂(307) 이래 280여 년 동안의 분열된 국면을 종결시켰을 뿐만 아니라, 문명의 신속한 발전을 위해서도 좋은 조건을 만들었다.

당송 시기 중국 고대 도시는 폐쇄식 이방제里坊制에서 개방식 가항제街巷制 도시로 바뀌었다. 상업의 발전에 따라 지방에서 경제형 도시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당 오대 시기의 유명한 상업 도시로는 성도成都·유주幽州(북경)·양주揚州·항주杭州·명주明州(영파)·천주泉州·광주廣州 등이 있었다. 중당 이후 주요 나루나 요지의 초시草市(도성 밖의 시장)도 날이 갈수록 발전하고 확대되었고, 일부 상업이 번성한 도시에서는 야시夜市가 나타났으며, 오대 시기 낙양에서는 정식으로 거리를 면한 상점이 허가되었다. 이들은 모두 송대 도시의 구조적 변화에 영향을 주었다.― 제3권 上, 244쪽.

수나라를 이은 당나라는 남북 문화의 융합과 국내외 문화의 교류라는 두 방면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실현해, 이로부터 중화문명은 새로운 시기에 진입하게 됐다. 이 시기의 문명은 세 가지 현저한 특징이 있다.

첫째는 다원화이다. 새로운 것과 옛것, 중국 고유의 것과 외래의 것, 남방의 것과 북방의 것 등이 서로 융합되면서 함께 발전했였다. 사상과 종교 방면은 물론 문학과 예술 방면도 이러지 않은 게 없었다. 둘째는 도시의 번영과 시민문화의 활발한 발전으로, 시민문화의 비중은 전체 문화 속에서 점점 늘어났고, 중화문명에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셋째는 문화 중심의 하층 이동이다. 사족士族에서 서족庶族으로 내려갔고, 다시 시민市民으로 내려갔다. 이들 특징은 일종의 종합적인 효과를 나타냈다. 즉 문화의 성격에서 창조성이 풍부하면서 현란하고 다채로운 모습을 띤다는 것이다.

제4권 上.下 명대 중엽-신해혁명

제4권은 중국 대륙에 형성된 현대 이전의 마지막 시대인 명.청 시기 가운데 가정제嘉靖帝 초기부터 신해혁명 시기까지를 다루고 있다. 명대 중엽부터 청말(16세기-20세기 초)까지는 중국 전통 농업문명의 최후 발전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 중국 전통 농업문명은 다방면으로 전 시대를 넘어서는 찬란한 성취를 획득했다. 이와 함께 그 내부에서는 일부의 새로운 경제 요소와 사상이 자라나고 있었다. 하지만 서구 세계가 농업문명에서 공업문명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있을 때 중국의 전통 농업문명은 낙후 상태를 뚜렷이 보이고 있었다.

19세기 중엽부터 서구 열강은 그 공업문명의 발전으로 획득한 경제·군사력에 기대어 빈번하게 중국에 대해 침략전쟁을 일으켜 중국을 열강의 식민지로 만들고자 했다. 강력한 적을 마주한 상황에서 청 왕조 말기의 부패한 정치, 경직된 제도, 시대에 대응하지 못한 의식 등의 원인이 더해지면서 1840년 아편전쟁 이후, 특히 1894년 중일갑오전쟁中日甲午戰爭(청일전쟁) 이후 나라는 이미 생사존망의 기로에 서게됐다. 서구 열강의 군사적 공격과 서구문명의 자극이라는 상황에서 나라를 구하고 부국강병을 이루기 위해 한 무리의 지식인들이 역사를 반성·비판하고 나서기 시작했다. 변법유신變法維新, 특히 민주혁명의 추동 아래 중화문명은 전환기로 돌입하여 세계를 향해, 근대 공업문명을 향해 발걸음을 내디뎠던 것이다.

# ‘중화문명사’는 중국의 문명사인 동시에 우리 역사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중화문명이 동아시아의 역사 발전에 많은 영향력을 발휘해 왔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리고 원 저서 제목인 ‘中華文明史’의 ‘中華’라는 단어에 ‘중국이 세계 문명의 중심’이라는 중국인들의 자부심이 한껏 배어 있음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서 우리 역자들과 편집진은 이 책의 번역 출판에 관한 논의를 시작하면서 먼저 번역서의 제목을 원 저서와 동일하게 사용할 것인가부터 고민하기 시작했다.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은 입장에 따라 다를 수 있고, 더구나 중국과 우리나라의 경우는 ‘동북공정’을 비롯해 시각차가 현저한 부분이 다수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고민은 쉽게 풀리지 않았다. 하지만 결론을 맺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결론은, 중국인들의 역사 인식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도 중요한 만큼 원 저서 내용은 충실히 번역하되, 우리나라와 관련된 부분에서 중국과 우리의 시각차가 존재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역자 주’를 통해 우리의 입장을 충분히 밝히도록 하자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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