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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8-05-02 20:5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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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박물관(관장 이원복) 문화재조사팀은 학술조사의 일환으로 지난달 9일부터 27일까지 서구 석성봉수대와 주변 지역에 대한 문화재 시굴조사를 실시했다.

▲ 석성봉수대 전경

 

[최준완 기자]부산박물관(관장 이원복) 문화재조사팀은 학술조사의 일환으로 지난달 9일부터 27일까지 서구 석성봉수대와 주변 지역에 대한 문화재 시굴조사를 실시했다.

 

현재 천마산 정상에 위치한 석성봉수대는 1971년 천마산악회에서 발굴조사나 고증 없이 담장 안쪽에 원형의 석축기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돌과 시멘트로 원통형 연대와 소형의 연통을 쌓아올린 것이다.

 

석성봉수대는 조선 초기 지리서인 ‘경상도지리지’(1425) 봉수조에 기록돼 있는 것으로 보아 조선시대 봉수노선 중 동래-한성 간에 위치한 봉수로서 조선시대 부산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봉수대 중 하나이다.

 

그러나 ‘경상도속찬지리지’(1468)와 ‘동국여지승람’(1481) 편찬 사이 어느 시점에 석성봉수대의 기록이 보이지 않고 오해야항 봉수대가 등장하고 있어 그 기능이 오해야항 봉수대로 옮겨져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석성봉수대 외벽모습

 

부산박물관에서는 이와 같이 부산지역 초기 봉수대로서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석성봉수대를 주목해 올해 초 사전 지표조사를 실시, 현 봉수대의 동쪽 하단부에서 원래의 봉수대 기단으로 추정되는 석축이 잔존하는 것을 확인했다.

 

시굴조사 결과, 봉수대의 평면 형태는 남북방향으로 긴 타원형으로, 중앙에는 네모진 연소실이 잔존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봉수대의 외벽은 동쪽 경사면에서 높이 약 75cm에 4단 정도가 남아 있었는데, 장방형의 깬 돌을 이용, ‘品자’형 쌓기를 해 고려시대나 그 이전의 석축 쌓기 방법으로 추정된다. 

 

또한, 외벽 하단부는 부분적으로 대형의 자연석을 이용해 봉수대 석축이 무너지지 않도록 보축(補築)한 것도 조사됐다. 봉수대 내벽은 판처럼 얇은 석재로 내면을 맞춘 것으로 외벽으로부터 안쪽으로 3.4m 지점에서 확인됐다. 봉수대의 내외벽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적의 침입에 대비해 준비해 둔 주먹 크기의 투석용 몽돌이 다수 확인됐다.

 

▲ 석성봉수대 추정 연소실 아래 시설 모습

 

한편, 정상부 지표의 50cm 아래에서는 연기를 피우기 위한 연소실의 바닥이 확인됐다. 연소실은 암반을 굴착하고 판석을 깔아 조성했다. 연소실 바닥에서 고동껍데기가 섞인 두께 10cm 정도의 암갈색 재층이 확인됐다. 또한, 연소실 아래층에서 암반을 약 63cm×120cm, 깊이 70cm 크기의 사각형으로 굴착한 후 바닥에 판처럼 얇은 돌을 깐 용도미상의 시설이 확인됐다.
 
봉수대 주변에는 봉수를 올리기 위한 재료를 보관하는 물품창고나 봉수를 운용하는 사람들의 기거처가 확인되는 경우가 있다. 조사단에서는 이러한 건물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산정의 남-북 능선 평탄부에 위치한 분묘 인근 경사면에서 다량의 기와편과 토기편을 수습했다.

 

수습된 유물은 통일신라시대의 인화문 토기편과 중판타날의 선조문 기와편, 고려 초기의 해무리굽 청자편, 흑백상감의 팔각접시편, 조선초기의 분청사기편 등으로, 조사단은 이들 유물을 통해서 볼 때 봉수대 주변에는 통일신라시대 말~고려 초에서 조선 초기에 걸쳐 봉수대 또는 왜구에 대비하는 군사관련 시설이 존재햇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보고 있다.

 

부산지역은 고대로부터 왜구 감시의 최일선 지역으로 석성봉수대를 비롯해 12개의 봉수대가 있고, 단일 지역 내에 12개소의 봉수가 있는 곳은 부산시가 유일하다. 이 가운데 기장 남산봉수대와 아이봉수대만이 제대로 된 학술조사가 실시됐을 뿐 나머지 봉수대는 원형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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