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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2-09 22:0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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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미추, 연극 ‘벽속의 요정’

어린 여자아이와 눈이 마주쳤을 때, 꼼짝없이 벽속에 갇혔던 남자가 말한다. “나는...요정이란다.” 요정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죽는다는 말에 아이는 아무에게도 요정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분명, 참지 못하고 말하고 싶은 순간이 아주 많았을 텐데. 그런 소소한 상상들이 자꾸만 떠올랐다. 연극 ‘벽 속의 요정’을 보고 돌아가는 내내.

‘벽속의 요정’은 일본 작가 후쿠다 요시유키의 원작을 번안한 모노드라마로, 스페인 내전 때, 30년을 벽속에 숨어있었던 한 아버지의 이야기를 모티브를 담고 있다. 배삼식 작가의 탁월한 각색으로 이야기는 이념 때문에 벽 속에 40년을 숨어살았던 아버지와 헌신적인 어머니, 그리고 딸의 일생을 그려낸다.

일제 강점기부터 한국전쟁, 정권은 교체되지만 끊임없는 이념대립의 세상을 살아가면서 서로를 끌어안는 세 가족의 이야기이다. 남편을 지키기 위한 아내의 고군분투기가 눈물겹다가도 아내와 아이를 위해 밤마다 수건을 두르고 남의 눈을 피해 베를 짜는 남편의 모습에 가슴이 먹먹하다. 서로의 마음을 먼저 생각해보는 아내와 남편의 모습이 아름다워 자꾸 코끝이 시큰해지기도 했다.

비밀의 요정, 스테카치가 아빠인 것을 알고 행복해하는 딸의 모습에 웃음도 났지만 아빠를 위해 계절마다 햇빛이 잘 드는 곳에 있는 꽃잎과 나뭇잎을 눈여겨보면서 다녔을 마음이 참 예뻤다. 그 딸이 베로 만든 웨딩드레스를 입고 시집을 가는데 그런 날에도 벽속에 숨어 나오지 못하는 마음이 오죽할까 싶어 서글프고, 서글픈 만큼 드레스가 참으로 고왔다.

40년을 벽 속에서 지내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지 않았을까?라고 생각했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아내와 딸의 아주 작은 일에도 늘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그렇기에, “살아있다는 건 가장 아름다운 것”이라고 진심으로 노래할 수 있었을 게다. 언제나 “함께”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4살 혀도 잘 돌아가지 않는 여자 아이부터 70세가 훌쩍 넘은 노인, 건달, 순사, 젊은 남자 역에 이르기가지 32역을 연기하는 배우 김성녀. 즉각적인 변신에도 놀랐지만 '열두 달 노래'처럼 우리네 흥을 돋우는 노래부터 뮤지컬 창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기와 노래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이야기의 진행에 따라 배역을 넘나들고, 각 인물에 맞춘 섬세한 동작들은 노련하고도 적절했고, 해설자로서 배역에 거리를 두고 관객들에게 던지는 한마디는 저절로 웃음이 새어나올 만큼 절묘하다.

탁월한 배우들이 점점 많아진다지만 배우 김성녀의 존재감은 이 모노드라마에서 절대적이다. 다른 누군가가 물려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10년 전 초연 때 관객들과의 약속을 지켜낸 김성녀 배우는 “극장을 찾아와주는 관객들이 있어 배우가 존재한다고...이제 10년을 채우고 다시 한 번 공약을 하고 싶다고. 이 연극을 물려줄 배우가 나타날 때까지 무대에 서겠노라”고 말하자 관객들이 박수와 함께 기립한다.

“살아있다는 건 가장 아름다운 것” 앙코르가 흘러나오고 극장 안은 환호와 기립박수로 가득해졌다. 그 극장 안에 있어서 행복했다. 배우와 관객이 온전히 교감하는 순간이었기에.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감동을 느꼈으면 좋겠다. 떠올리면 마음 한 편부터 따사로워지는 온기를 품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힘겨운 어떤 날에 떠올리기를 “살아있다는 건 아름다운 것”이라고.

명동예술극장에서 오는 16일까지 공연한다. 극단 미추의 손진책 연출과 후쿠다 요시유키의 원작을 각색한 극본은 배삼식 작가. 배우 김성녀의 경이로운 연기는 대체불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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