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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2-23 21:0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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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을 쉬었다. 깊이. 마음 깊숙한 곳까지 신선한 바람이 들어가라고”

연극 ‘가을 반딧불이’는 정의신 작가의 대표작으로, 연극 ‘야끼니꾸 드래곤’으로 한국과 일본 양국에서 동시에 주목받아 작가, 연출가로 입지를 굳힌 재일교포 연극인이다.

‘겨울 선인장’ ‘아시안 스위트’ ‘쥐의 눈물’ ‘나에게 불의 전차를’ 등의 대표작이 있고 어디서나 만날 수 있는 우리들의 이야기를 섬세한 묘사, 과장되지 않은 감정과 유머로 따스하게 작품 안에 담아내고 있다.

연극 ‘가을 반딧불이’는 지난 2001년 일본에서 초연되고, 지난 해 한국에서 초연되어 많은 사랑을 받았다.

낡아빠진 냉장고, 라디오, 한 칸 뿐인 캐비닛, 녹슨 자판기, 색이 바란 소파,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감싸고 있는 작은 목조 가옥과 주변에 흐르는 잔잔한 호수, 작게 연결돼 있는 구름다리. 가옥 뒤편으로 우거진 울창한 숲이 청량감마저 주는 아름다운 무대였다.

스물아홉 청년 다모쓰는 변두리에서 보트 선착장을 운영하는 삼촌 슈헤이와 21년째 살고 있다. 어릴 때 아버지 분페이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상처를 안고 있지만 슈헤이와 별 문제 없이 살아간다. 평화롭던 일상에 마스미와 사토시가 끼어든다. 슈헤이의 애인인 마스미는 임신했고, 선착장에 단골이던 사토시는 갈 곳이 없다. “이곳이 너무 좋다”면서 “막무가내로 함께 있게 해달라”고 떼를 쓴다.

한적한 선착장에서 다모쓰는 가끔 불쑥 찾아오는 아버지 분페이의 유령과 싸우는 일 말고는 별다른 일없이 평화로웠지만 슈헤이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마스미의 방문과 함께 다모쓰는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시간마저 멈춰버린 듯 조용하던 공간이 시끄러워지고 몰랐던 사실들을 깨닫게 되면서 모든 것이 달라진다.

자신이 알고 있던 사실들과 다른 이야기들은 다모쓰의 오래된 기억과 상처들을 헤집어 내고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워진다. 세상 하나뿐이라 믿었던 가족 ‘슈헤이’를 떠나겠다는 결심을 할 정도로.

 하지만 슈헤이도 다모쓰 없이는 살 수 없다. 집을 나가려는 다모쓰를 말리려다 슈헤이는 자신의 아프고도 후회스런 과거를 말하게 되고, 두 사람의 다툼에 끼어든 마스미는 임신한 아기의 아버지가 사실은 슈헤이가 아니라는 비밀을 털어놓는다. 사토시는 여기저기 말리고 끼어드느라 정신이 없다.

“가족이란 거짓말을 해서는 안 되는 거야”라는 말은 어린 다모쓰의 마음을 다잡아 준다. 곧 데리러 올게 약속하고 삼촌에게 자신을 버린 아버지에 대한 상처를 묻어둘 수 있게 했던 것이다. 삼촌에게 자신도 거짓말을 하지 않고, 삼촌이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 리가 없으니 21년 동안 아무런 문제없이 살아올 수 있었다.

하지만 슈헤이가 절규한다. 잘못 알려 주었다고. 거짓말인 것을 알아도 가끔은 모르는 척 눈 감아 줄 수 있고 속아주기도 하는 것이 가족이라고. 굳이 잘잘못을 들춰내 아프게 하기보다 무조건 ‘편’을 들어주는 거라고.

아버지 분페이가 다모쓰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20년이나 지나버린 슈크림 빵을 건넨다. 투덜거리면서 한 입 베어 무는 다모쓰의 마음은 어땠을까? 어쩌면 선착장에 처음 도착했던 날부터 지금까지 다모쓰는 분페이가 돌아와 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나보다. 약속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일련의 사건들 속에 다모쓰의 마음이 조금씩 열리기 시작했기 때문일 거다. 이제야 진짜 한걸음 걸을 수 있는 때문일 거다. 또 훌쩍 사라져버리는 아버지를 보고 중얼중얼 “뭐 또 오겠지”하고 피식 웃는 다모쓰가 한결 편안해보였다. 진짜 웃는 얼굴이라서 참 좋았다.

아옹다옹 시끄럽다. 각자의 사연을 가지고 모인 사람들. 어느 새 한 공간에서 썰렁한 농담이나 나누는 게 당연해진 그들은 ‘가족’이 되었다.

“죽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사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다. 그런데 어쩔 도리가 없다...” 분페이는 말한다.

어쩔 도리가 없으니 안타까운 삶을 이어간다. 그래도 그 안타까운 삶 가운데 살아있으니 가을 반딧불이를 만난다. 엉뚱하고도 아름다운 빛. 어두울수록 더욱 밝게 비춰주는 작지만 따사로운 빛.

그 빛을 만나고 싶다면 대학로 예술극장 대극장으로 오는 3월 2일까지. 슈헤이-김정호, 다모쓰-이현응/유승락, 마스미-이항나, 분페이-김한, 사토시-배성우/이도엽이 출연한다. 원작은 정의신, 역은 명진숙, 연출은 2013 이 작품으로 신인 연출상을 받은 김제훈이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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