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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2-27 19:3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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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정물화’는 재일 한국인 극작가이자 소설가인 유미리의 작품으로 전통적인 극작술에서는 벗어나 있으나 독특하고 시적인 문학성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유미리는 ‘도쿄 키드 브라더스’ 극단에 연수생으로 입단한 것을 계기로 극작가, 연출가로 창작활동을 시작해, 1993년 희곡 ‘물고기의 축제’로 24살 최연소의 나이에 ‘기시다쿠니오 희곡상’을 받는다. 이외에도 ‘정물화’ ‘해바라기의 관’ ‘그린벤치’ 등의 희곡을 발표했고, 이후 1997년 소설 ‘가족 시네마’로 일본 최고권위의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자전적 소재를 통해 가족의 문제와 사춘기의 방황 같은 주제가 초기작품 세계였다면 점차 사회적 이슈로 소재를 넓혀나가면서 인간 내면의 황폐와 소통의 단절을 고발하고 있다.

사과나무 꽃잎이 하얗게 날리는 4월의 마지막 날. 보수적이고 엄격한 가톨릭계 여고의 좁은 교실에 다섯 명의 문예부 학생들이 모여 방과 전후의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들은 돌아가면서 수업놀이를 하거나, 수다를 떨며 사춘기 특유의 감상에 빠져든다. 서로의 마음을 얻기 위해 애태우기도 하고 질투하고 상처를 받기도 하면서, 소녀들은 각자 머무르고 싶은 순간에 대해 이야기한다.

한편, 불안하지만 생기 넘치는 친구들과는 달리 나나코는 늘 죽음을 생각하고 그 세계와 교감하며 지낸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내포되어 있는 작품이라는 설명에 흠칫 머뭇거리게 된다. 21살의 작가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살아왔던 것일까 하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올라서.

작가의 분신과도 같은 나나코의 언어들은 아름답고 맑지만, 어딘가 속해있지 않은 듯 둥둥 떠다니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친구들과의 수업놀이에서 빠지지는 않지만 그녀는 그저 그 공간에 ‘있을 뿐’ 함께 하고 있지는 않다. 나나코에게만 들리는 바이올린 튜닝 소리, 타이스의 명상곡은 그녀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아 서글펐다.

소녀들은 학교연못가에 심겨진 커다란 사과나무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며 제법 진지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학교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하는 소녀들은 생기로 충만하지만 누구에게나 찾아올 죽음에 대해 깨닫게 되는 나이이기도 했다.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누군가보다 안타까운 죽음으로 스러져간 사람을 말하는 소녀들. 사력을 다해 피어있는 사과나무 꽃이 어느 순간 그 아름다움을 감당하지 못하고 흩어지듯, 자신들의 삶 또한 그러하리라 깨닫고 있는 것일까?

어떤 학생이 어디서 자살했다더라, 밤이 깊어지면 그곳에 유령이 나타난다더라 하는 이야기는 어느 학교에나 있는 전설이지만 친구들과의 수다 속에선 흥미진진한 실제가 되던 기억이 떠올랐다. 소녀들의 수다와 수업놀이는 아무것도 아닌 일에 일희일비하던 날들을 기억나게 해 미소 지어지기도 하고, 한편으론 위태로운 그녀들의 감성이 느껴져 안타깝기도 했다. 어리석어 보이는 호기심마저 얼마나 찬란한 시절인가!

치하루, 나츠코, 카오리, 후유미-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넣어서 이름 지은 친구들은 계절 같은 성격마저 지녔다. 작가의 섬세함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서 물고기 어(魚)자가 들어 있는 나나코의 이름은 어쩐지 안쓰럽다. 수족관 속에서 어쩌면 멈춰진 듯 보이는 세상을 보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해서.

‘정물화’란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생명이 없는 물건을 그린 그림으로, 미적배열을 위해 화가가 이리 저리 움직였을 뿐, 그림의 주인공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다.

나나코에게 세상은 스스로 움직일 수 없는 정지된 곳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이리저리 움직여도 벗어날 수 없는 수족관처럼. 그래서 마침내 벗어나려는 마음을 먹었을까? 신선한 공기를 온 몸으로 만나면 곧 숨이 끊어질 것을 알아도, 잃어버릴 것이 돌이킬 수 없다 해도 아무 상관없다는 듯이.

그래, 그래서 나나코가 벗어났다면...그것으로 되었다. 서글프고 안타까울지라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 속에 어쩌면 ‘삶’을 깨달았을 지도 모른다. 그것이 스치는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았을 지라도.

연극 ‘정물화’는 다음달 16일까지 대학로 예술극장 3관(쇳대 박물관 지하)에서 공연한다. 특히 이 작품은 성기울 연출 특유의 집요한 섬세함이 소녀들 사이에 오가는 미세하고도 풍부한 감정과 떨림을 잘 보여준다.

나나코 역에 전수지, 후유미 역에 류혜린, 나츠코 역에 김희연, 치하루 역에 박민지, 카오리 역에 서미영, 히가시 수녀 역에 천정하, 사쿠라이 수녀 역에 김누리.김현숙 배우가 함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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