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삼일 오후 열한시에 하관을 떠나 부산으로 향한 관부연락선 덕수환이 4일 오전 4시경에 대마도 엽흘 지날 즈음에 양장을 한 여자 한 명과 중년 신사 한 명이 서로 껴안고 갑판으로 돌연히 바다에 몸을 던져 자살을 하엿는데 즉시 배를 멈추고 수색하엿스나 그 정족을 찾지 못하엿스며..’
1926년 8월 5일 ‘현해탄 격랑 중에 청년남녀의 정사’라는 제목으로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문 중 일부이다. 두 사람은 가명으로 승선했으나 한국 최초의 근대극다운 희곡(대표작: 난파, 산돼지)을 쓴 전도유망한 극작가 김우진,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로 신여성의 대표주자 윤심덕으로 밝혀진다. 당대 최고의 스캔들 기사였다.
뮤지컬 ‘글루미데이’(연출 성종완)는 실제로 일어났던 이 이야기를 바탕으로 사랑과 배신, 삶과 죽음, 정해진 운명에 대항하는 의지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두 사람의 투신은 단지 불륜에 의한 감상적인 선택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전제로 시작한다. 그리고 가상인물 ‘사내’가 등장한다. 두 사람의 인연과 사랑, 죽음에까지 연관되어있는 신원불명의 미스터리한 인물.
관부연락선 안의 방 하나뿐인 세트에서 세 사람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배는 상징적이면서도 이 작품의 무대로 멋지게 쓰이고 있다. 방 안의 아기자기한 소품들은 시대를 더욱 낭만적으로 느끼게 해주고, 한편으론 사방이 막혀있었던 시대처럼 느껴진다. 왼쪽으로 커다란 창이 있고 비스듬한 배의 선체를 따라 진행되고 있는 배경과 시간을 관객에게 보여줌으로 시간과 공간을 마음껏 오고간다.
그 중심엔 김우진의 베스트프렌드 ‘사내, 한명훈’이 있다. 그는 김우진에겐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혁명성이 있다며 치켜세우고는 함께 민족을 위한 작품을 써보자고 청한다. 창의적인 사고, 창조적인 삶에 대해 한껏 부풀어 오른 김우진. 그리고 역시 사내의 소개로 운명적인 사랑, 윤심덕을 만나게 된다.
1920년대의 청춘들은 시대의 암울함에도 쏟아져 들어오는 서양문물로 인해 어느 때보다 새로운 것들에 민감했고, ‘연애’를 동경했다. 가난한 국비유학생인 윤심덕과 부유한 유학생이었던 김우진은 만나자 마자 사랑에 빠진다.
윤심덕은 자유를 갈망했고 또한 미래를 위한 준비보다는 ‘현재’에 충실했다. 대사 중에 “나는 찰나의 순간을 사는 사람이야. 오래살고 싶은 마음 없어” 당돌하다기 보다는 당당하게 느껴지는 심덕의 본질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런 그녀가 사랑한 남자, 김우진. 처음엔 즐거웠던 사내와의 작업이 점점 힘들어진다. 그리고 점점 단정한 모습이 흐트러진다. 이성적이고 지적이었던 우진은 무너져가는 중에도 끊임없이 질문한다. 결정된 운명은 없다고. 바꿀 수 있다고. 의지만 있다면.
김우진이 부담을 느끼고 심덕을 떠났던 때에도 곁을 지켜준 사내의 존재는 두 사람을 이어줄 듯, 관계 사이에 파고들어 틈을 만든다. 사랑하면서도 온전히 안아줄 수 없게 만든다. 둘만 있을 때에도 피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존재감. 두려움은 극으로 치닫는다.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시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기에 지금 이순간이 전부인 듯 살았던 윤심덕. 어쩌면 ‘미래’를 준비하느라 충분히 ‘오늘’을 살지 못하는 지금의 시대보다 더 치열한 생이었을 것이다. 누구보다 진보적으로 보였으나 오직 김우진을 향한 사랑은 자신도 어쩌지 못했던 여자. 도도하고 강렬한 심덕의 이미지는 오히려 화려해서 애처롭다. 곧 꺾일 것을 알기에 있는 힘을 다하는 것 같아서.
신비로운 ‘사내’는 누구였을까? 타인이었을까, 아니면 우진의 또 다른 자아였을까? 겉으로 침착하고 조용한 만큼 안으로는 무자비할 만큼 행동하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든 마음대로 하라면서 꼭 지켜야할 것을 강압하는 모습에선 왠지 오랜 우화들에서 낯익은 ‘절대 악’같기도 했다. 시원하고 당당한 성격은 점점 잔인하고 포악스레 느껴지지만 이상하게도 매력적이다.
그런 사내에게 압도당해 점점 무너져 내리면서도 오히려 흐트러질수록 정신이 또렷해진 듯, 마음을 굽히지 않는 우진. 함께 작업하던 ‘사의 찬미’희곡의 결말을 마음대로 바꾸려고 한다. 심덕마저 자신을 온전히 믿어주지 않는 상황에도 정해진 운명에 맞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우진의 강한 의지가 돋보였다. 그토록 갈망했던 창의적인 사고와 창조적인 삶은 이미 그의 안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단지 세 사람뿐이지만 텐션이 강하다. 게다가 피아노와 현악기의 앙상블은 서글프고도 강렬해 관극을 하고 나와서도 내내 바이올린의 멜로디가 들리는 것만 같다. 오래된 축음기에서 나오던 윤심덕의 ‘사의 찬미’ 노래와 함께.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꿈도 명예도 사랑도 없다......”
사내의 강한 압박에도 마음만은 굴하지 않았던 김우진 역에 정문성, 임병근, 김경수, 차가워 보이지만 사랑에 모든 것을 걸었던 윤심덕 역에 임강희, 안유진, 곽선영, 두 사람의 운명을 가지고 노는 듯, 강렬한 카리스마를 보이는 사내 역에 이규형, 정민, 신성민 배우가 캐스팅 됐다. 오는 4월 27일까지 대학로 DCF대명문화공장 비발디파크홀 1관에서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