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5월, 봄이 돌아왔다. 남산 예술센터에 연극 ‘푸르른 날에’와 함께. 온 나라가 ‘세월호’사건으로 우울하고 무거운 분위기인 가운데 30년 전 광주의 봄날을 이야기한다. 어쩌면 이렇게도 닮았을까? 30년 전 일어났던 일이 여전히 반복되고 있는 현실 앞에 연극이 말한다. ‘변함없이 푸른 꿈을 꾸며 살아달라고’
연극 ‘푸르른 날에’는 정경진 작가 원작(제 3회 차범석 희곡상), 고선웅 연출로 아픈 역사 5.18 광주 민주화 운동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때의 사실들보다 그 날들로 인해 달라져버린 사람들의 삶과 오늘을 바라보게 한다. 감상적이기 보다 여전한 현실로부터 자신과의 화해에 이르지 못한 사람의 이야기이다. 그는 ‘우리’이고 ‘나’인 것이다. ‘명랑한 신파’라는 소개답게 연극은 무겁지 않고 경쾌하고 우스꽝스럽게 다가선다.
출가해 30년이 된 여산 스님. 그는 오래된 지인으로부터 속세에 있을 때 연이 닿았던 정혜로부터 딸 운화의 청첩장을 받는다. 운화가 결혼하니 식장에 데리고 들어가 달라는 부탁을 받자 지난 30년 전의 일들이 떠오르기 시작한다.
1980년 5월 18일, 전남 대 학생으로 야학 선생이던 민호는 여자 친구 정혜의 동생 기준을 지킬 겸 전남도청을 사수하러 가지만,함께 했던 동료들은 거의 죽고 기준도 희생당한다. 민호는 항복해 살아남지만 모진 고문을 받다가 변절하게 되고, 그는 죄책감과 괴로움 속에 정신 이상 증세까지 겪게 된다. 그리고 임신한 정혜를 두고 출가하게 된다.
이야기를 생각하면 나올 수 없는 분위기가 감돈다. 우스울 만큼 경쾌한 배우들의 동작과 신파조의 대사는 신선한 리듬감을 주어 빠르게 몰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어쩌면 가벼운 신파 연기가 있기에 묵직한 장면이 더 큰 울림으로 남는다. 2011년 초연부터 함께 맞추어 온 배우들의 앙상블과 사천왕상 뒤로 비치는 북 연주 장면, 학살2에서 김남주의 시를 한 소절씩 읽어가다 마침내 절규하게 되는 장면은 일체된 호흡을 느낄 수 있는 명장면이다.
인생의 푸르른 날,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지키려한 청춘들이 피우지도 못한 채 저물었다. 한집 건너 한집, 매일 밤마다 울음바다였다는 그 곳의 이야기는 여전히 힘을 가졌다. 그저 건네 들을 뿐인데 아직도 이렇게 아프니 말이다.
여자 친구의 동생이 혹여 다칠까 해서 함께 갔던 민호는 결국 모두 희생당한 현장에서 살아남지만 모진 고문을 겪게 된다. 이 물고문 장면은 이 연극을 본 사람들에겐 상당히 깊이 각인된다. 사실적인 연기는 숨이 막힐 만큼 괴롭고 서글프다. 결국 민호는 기준과 죽어간 동료들을 배신하고 살아남는다. 살아남는다는 것은 그에게 중요한 일이었고, 그래서 그는 살아남았지만 도저히 사람들과 만나고 현실을 살아갈 수 없어 그는 자신과 주변의 모두를 위해 출가한다.
임신한 여자 친구를 두고 출가라니. 하는 마음도 잠시, 그러지 않았다면 어쩌면 그는 정혜를 더 가엾은 사람으로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그 시절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아직도 여전히 아프고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들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고 아무리 말해주어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 없기에 아픈 상처를 극복하는 것 또한 스스로의 몫인 것이다. 그래도 할 수 있다면 작은 온기나마 전할 수 있기를 희망하는 노래가 어쩌면 이 연극일 것이다.
형인 진호가 면사포를 민호에게 전해주는 것에서, 이번에는 기준이 민호에게 면사포를 건네주는 것으로 엔딩이 바뀌었다. 기준에 대한 죄책감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화해하게된 것이다. 용서하지 못한 것은 결국 기준이 아니라 민호 자신이었음을 이제 깨달은 것일까?
운화의 결혼식장에서 서로를 향해 미소 짓는 민호와 정혜, 두 사람의 뒤로 젊은 날 그들이 치르지 못했던 결혼식이 거행된다. 도청을 사수하려다 희생당한 동료들을 하객으로. 그들의 그 환한 웃음이 잊히지 않는다. 어쩌면 반드시 있었을 그들의 푸르른 날이기에. 서정주 시 송창식의 노래 ‘푸르른 날에’와 함께. 참으로 먹먹했다.
김학선, 정재은, 이영석, 이명행, 조영규 등 같은 배우들이 연극‘푸르른 날에’를 지키고 있다. 딸 운화 역을 빼고는 모두가 연속 4년 동안. 굉장한 기록이며 이 작품에 대한 애정과 긍지까지도 느껴진다. 그들의 고민과 노력에 관객들 역시 잊지 않고 함께 한다. 창작연극에서 전례가 없는 일일 것이다. 해마다 5월이면 만나는 작품으로 남겨진다면 참 멋진 일이 아닐까?
한편, 연극 ‘푸르른 날에’는 오는 6월 11일까지 남산 예술센터에서, 이어 13일부터 22일까지 광주 빛 고을 시민 문화회관에서도 공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