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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사등록 2014-06-26 21:0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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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랑 두 개뿐인 의자. 나이든 언어학자와 선원이었던 젊은 남자, 예쁘지만 조금 이상한 스튜어디스. 무대는 이것이 전부였다. 가끔 스튜어디스가 가지고 나오는 소품이 추가될 뿐.

연극 ‘블랙박스’는 대학로에서 낭독극 형식의 초연, 김동수플레이하우스에서 워크숍을 열었다. 몇 차례 '부조리와 시극'이라는 주제로 독일 함부르크대학, 미국 하버드대학에서 번역과 강의를 통해 소개한 것을 제외하면 제대로 무대를 갖춘 형식은 이번이 처음이다. 2008년 장정일, 하일지, 정영문, 서준환 등이 일으킨 희곡 부흥운동 '드라마톨로지'에 참여한 창작물이고, 하일지 '파도를 타고', 정영문 '당나귀들', 서준환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 등과 함께 희곡집 '숭어 마스크 레플리카'에 실렸다.

보통 2인극이나 등장인물이 적은 연극은 상당한 밀도와 개연성으로 집중력을 높이지만 연극 ‘블랙박스’는 그 부분에서 매우 불친절하다. 이해하려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복잡하고 산만하다. 그러나 다 내려놓고 순간순간 대사를 듣고 있으면 피식 웃음이 난다.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려고 하면 그야말로 머리에 쥐가 나지만,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두면 오히려 재밌어지는 연극적인 작품이다.

비행기 안에서 벌어지는 일을 그린 '기내극'을 표방하고 있고, 065년 비행기가 이륙한 뒤 밤 열한 시부터 자정까지, 구름 속에 머무는 한 시간 동안의 이야기다. 추락하지 않으면 열어보지 않는 '블랙박스'처럼 인생의 굴곡과 인간의 본질에 대한 비유가 항공기 내부에서 두 인물간의 대화를 통해 쏟아져 나온다.

이륙과 동시에 조종실은 구름 속에서 불빛을 발견한다. 관제탑에서 보내는 신호라고 생각하고 비행기는 그 불빛을 따라가지만, 비행기는 아무도 본 적 없고, 아무도 볼 수 없는 기묘한 구름 속을 헤맬 뿐이다. 착륙할 곳을 찾지 못한 채 허공에서 1시간 동안, 하지만 지상의 시간으로는 무려 이틀 동안이나 실종된 채 활공을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시간 동안 기묘한 일행은 끝없는 말을 주고받는다. 때로는 마스크 팩을 하고 때로는 훌라후프까지 돌린다. 그러나 어떤 행동을 해도 입은 쉬지 않는다. 수많은 비유와 은유를 쏟아내는 언어학자와 자신의 속내는 감추고 대충 빠져나가려는 선원. 그러나 거짓말도 때론 진실을 이야기한다.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보면 거짓말이라는 사실까지 당도하는 법이니까. 때론 허무개그에 가까운 언어유희지만 때론 깊숙이 숨겨 놓은 치부를 느닷없이 공격당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니 작가의 필력이 대단하다.

실험적인 시와 다양한 문화 작업으로 주목받은 작가 김경주는 “현대인의 불안은 말에 있다. 불안한 사람일수록 말 속에 숨는다”라면서 말 속에 감추어진, 숨어있는 인간의 불안을 치밀하게 해체한다.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순간순간 들려오는 대사에 집중하다보면 순간의 깨달음도, 허무함도 느낄 수 있다. 비슷한 정답이나 느낌은 어쩐지 존재하지 않을 것 같다. 지금까지 나를 만들어온 일들이 떠오르고 사라질 테니까. 전부가 다른 것을 느끼고 깨닫게 되는 신선한 연극, 감정마저도 강요당하는 시대에 나만의 감정을 찾을 수 있는 무엇이 그립다면 ‘블랙박스’를 열어보는 것도 재미있지 않을까?

연극 ‘블랙박스’는 무대 활동가로 활동하면서 다양한 거리예술을 펼쳐온 유영봉 연출, 대학로와 스크린을 오가며 멋진 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배우 이창직, 최광덕, 권택기, 곽현석, 오선아, 곽정화가 출연한다.

희곡으로는 잘 알려진 작품이지만 무대 위에서 현실화 시킬 수 없다는 이유로 제작에 어려움을 겪었던 희곡 ‘블랙박스’를 극단 에스의 주성근 대표의 노력으로 국내 초연됐다. 이번 공연은 오는 29일까지 대학로 스튜디오 76에서 공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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