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각형의 무대. 오브제라고는 오직 투계 판을 연상시키는 무대뿐이다. 관객석은 사방에서 판을 바라보는 형태로 돼 있다. 종이 울린다. 존과 M의 치열하고 유치하고 속속들이 내뱉는 언어들이 날뛴다. 이기지 못하면 죽을 것처럼.
연극 ‘수탉들의 싸움(연출: 송정안)’은 영국의 촉망받는 작가 마이크 바틀렛(Mike Bartlett)’의 작품으로, 지난 2009년 벤 위쇼(Ben Whishaw)와 앤드류 스콧(Andrew Scott)의 캐스팅으로 초연, 평단과 관객들의 사랑으로 Laurence Olivier 상을 수상하고, 2012년 Off-Broadway에서 공연돼 성공을 거뒀다.
게이인 존은 오랜 연인이었던 M과 말다툼을 하고 헤어진다. 돌아가는 길에 통근 길에서 자주 마주치던 매력적인 여자W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하룻밤을 보내게 된다. 그 경험이 너무 좋았던 존은 M과 화해하고도 그녀와의 관계를 정리하지 못하는데, 그 문제로 다투던 M은 W를 저녁식사에 초대해 담판을 지으려 한다. 그 식사 자리에 M의 아버지인 F까지 합세하는데, 존은 과연 어떤 선택을 내리게 될까?
성주체성을 소재로 한 연극은 쉴 새 없이 쏟아내는 배우들의 대사로 긴장감이 넘친다. 처음에는 동성애 이야기인가 했으나 결국 인간이 인간을 바라보는 시선의 잣대와 그 누구도 그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는 당연하게 보이는 기이한 폭력,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인간의 한계까지 이야기는 확장된다.
한사람을 사랑하게 되었던 어린 존은 그 사람이 남자였던 탓에 ‘게이’가 된다. 그리고 사회가 정해놓은 ‘게이’의 틀 안에서 입고 먹고 생각하게 되어버린다. 그런 그가 여자인 ‘W'와 성적인 즐거움을 느끼고 또 그녀와 함께 있는 동안 새로운 인생을 꿈꾸기도 한다. 그는 M과 있을 때와 W와 있을 때 겉모습은 같지만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따로따로 만났을 때는 M과 존, W와 존이 싸우다가 화해하는 일이 반복되지만 M과 W가 만나면서 존을 차지하려는 두 사람의 싸움은 점점 커진다. 두 사람은 존에게 ‘선택’을 강요한다. 어쩔 줄 모르고 우왕좌왕하는 존의 모습은 처음엔 한심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선택하라고 윽박지르는 나머지 인물들 속에서 눈물을 쏟아내는 모습이 낯설지 않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정답을 강요당하는 것이 인간의 삶이 아닌가? 의문이 들었다. 선택의 여지조차 정해진 틀 안에서 해야 하고 그래야 비로소 인정받고 받아들여지니까. 그래서 존의 마지막 선택은 서글펐다. 잠시 다른 세상을 꿈꾸었던 존은 끝내 ‘익숙’한 것을 선택했다.
그러나 연극의 결말이 씁쓸한 것은 설사 존이 다른 선택을 했다 해도 그는 다시 ‘익숙’한 삶으로 살아가게 될 것 같아서였다. 선택을 강요당하며 곁에 있는 사람에 의해 좌우되는. 그가 있는 모습 그대로, 존재하는 자체만으로 인정받는 날이 올 수 있을까? 그가 바란 다른 세상은 오직 그 사실을 전제로 하기에 이룰 수 없는 꿈처럼 느껴졌다.
좋은 연극으로 사랑받는 ‘노네임 씨어터’의 작품으로 이번에도 역시 관객들의 무한한 신뢰를 받고 있다. 우유부단하지만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는 존 역에 ‘히스토리 보이즈’의 박은석, ‘날 보러와요’ ‘필로우맨’으로 자신의 진가를 더해가는 배우 김준원이 존의 동성 애인인 M역을, 여성스럽고 다정하지만 소유욕 강한 W역에 ‘나와 할아버지’의 손지윤, M을 선택하라고 강요하는 F역에 ‘배수의 고도’ 선종남 배우가 열연한다.
저 밑바닥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까지 드러내며 치열하게 싸우는 ‘수탉들의 싸움’을 보고 싶다면 두산 아트센터 스페이스 111에서 오는 8월 3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