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파식적’은 신라 신문왕 2년에 용으로부터 대나무를 얻어 만들었다는 전설의 피리이다. 이 피리를 불면 적병이 물러가며 질병이 낫고 또 가뭄 때는 비가 내리며 장마 때에는 비가 그치는 등 바람을 재우고 파도를 가라앉게 하는 이상한 힘이 있었다. 왕은 이 피리를 천존고에 모시고 그 이름을 ‘만파식적’이라 하여 국가의 보물로서 소중히 여겼다.
‘삼국유사’에는 효소대왕 때 화랑 부례랑의 실종으로 ‘만파식적’을 도난당했고 이후 부례랑의 귀환으로 다시 찾게 되었지만 다음 원성왕 때까지 보관되었다가 자취를 감추었다고 쓰여 있다. 만파식적 설화는 ‘삼국유사’ 2권 기이(紀異) 만파식적조와 ‘삼국사기’ 32권 잡지 제1 악조(樂條)에 실려 있다.
2014년 국립극단이 가을을 맞아 우리의 고전을 새로운 창작극으로 만들자는 기획아래 삼국유사에서 이야기 소재를 찾은 ‘삼국유사 연극만발’이 진행된다. 첫 작품인 ‘만파식적 도난 사건의 전말’은 ‘해무’의 작가 김민정이 만파식적 설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쓴 타임 슬립 판타지 희곡이다.
새로 발굴된 유적지에 세워진 ‘천존고’박물관 개관식에서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을 불게 된 길강. 그러나 연주를 하는 순간 박물관이 무너져 내리면서 길강은 신라시대로 넘어가게 되고 신비한 힘을 가진 ‘만파식적’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현대로 돌아가기 위해 피리를 빼앗길 수 없는 길강은 어떻게 될 것인가?
연극의 시작에 의자를 권력에 빗대어 말하는 부분이 인상적이다. 독차지하기 위해 적과 손을 잡기도하고 수족처럼 함께 지냈던 이들을 무 자르듯 베어내기도하면서 한번 앉은 의자에서 일어나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싸운다. 권력의 맛을 보게 되면 그리된다는 것이다. 힘이란 가질수록 놓을 수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을 구해준 사람이어도 자기가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거슬려 거침없이 처리하려하는 왕과 백성을 위한다는 이상을 향한 것이지만 주군으로 모셔왔던 왕을 배반하고 새로운 세상을 만들겠다는 화랑. 거대한 힘 앞에서 피리를 불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목숨 줄이 위태로운 길강은 이상이 아무리 높아봐야 소용없다고 뼈있는 소리를 한다.
성질 더러운 왕, 이미 썩을 대로 썩어버린 왕이야 그렇다 치고 새로운 세상 병으로 아픈 사람도, 힘이 없어 부당한 일을 당하는 사람도 없기를 바라는 낭도들의 우두머리 화랑의 이상에 실은 혹 할 수도 있다. ‘만파식적’이 가진 힘으로 새로운 세상이 되도록 하자는 것은 그럴 듯하게 들렸다.
그러나 결국 진정한 화해를 이루지 못하고 살육으로 세워지는 이상이란 더 큰 힘으로 무너지게 되는 법이다. 불안한 싸움의 한 가운데서 ‘만파식적’이 더 이상 소리 나지 않는 피리가 된 것은 그래서 의미심장했다. 전설의 피리라지만 그것을 사용하려는 사람들은 오직 탐욕으로 일그러진 이들뿐이니 말이다.
하지만 겨우 돌아온 현대에서도 길강은 이리저리 휘둘리고 만다. 박물관 붕괴와 함께 추측이 난무하는 가운데 결국 그는 차가운 박물관 어느 바닥에 누워 있는 것이다. 어느 곳, 어느 시대를 살아도 그는 권력에 이용당하고 휘둘리다가 쓸모없다 여겨지면 버림받는 소모품이 되는 것이다.
신비로운 힘을 가진 전설의 피리 ‘만파식적’을 차지하려는 것은 권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혹시 그러한 힘을 가진 피리가 현대에 나타난다면? 하는 상상력을 통해 재밌는 이야기가 그려졌다. 함께 하기 위해 손을 잡을 수 있다면 ‘만파식적’은 필요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럴 수 없는 존재이고 그래서 ‘만파식적’은 어떤 시대나 전설일 수 있었던 것이다.
진정으로 화해하고 양보할 수 있게 되는 그 어떤 날이 정말 올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타임 슬립을 통한 모험에도 기죽지 않는 길강 역에 김주완, 천존고의 박물관장 역에 이현, 만파식적을 도난당하는 과거의 인물 효소대왕 역에는 김수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본인의 권력을 쟁취하는 현재의 인물 인미란과 정의가 실현되는 사회를 믿으며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과거의 인물 부례랑 역은 채윤서, 오민석이 권력을 탐하는 현재의 인물 지동관과 과거의 인물 김천일 역을 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