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 신비한 신화 속의 이야기들이 숨 쉬는 특별한 분위기를 가진 땅. 그리스 신화 속에 사는 아테나여신, 페르세우스, 고곤(바라만 보아도 돌로 변해버리는 메두사), 클라이템네스트라, 아가멤논. 위대한 작가와 그의 작품, 그리고 그리스 신화가 작품 저변에 깔려있는 걸작, 연극 ‘고곤의 선물’이다.
연극 ‘고곤의 선물’은 ‘에쿠우스’ ‘아마데우스’의 작가 피터 쉐퍼 최고의 역작으로 그의 모든 작품을 집대성한 만큼 깊이와 울림이 남다르다. 극단 실험극장의 대표작으로 2003년부터 정동환, 정원중, 김소희, 서이숙 등 연극계 실력자들이 번갈아 가며 꾸준히 관객들의 사랑을 받아왔다. 이번에는 세종문화회관과 극단 실험극장의 공동주최로 2년 만에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됐다.
천재 극작가인 에드워드 담슨은 실족사로 갑자기 사망한다. 미망인이 된 헬렌에게 찾아온 젊은 교수는 남편의 전처 아들, 필립 담슨이다. 아버지의 전기를 쓰게 해달라며 막무가내로 그리스까지 찾아온 그에게 헬렌은 절대로 중간에 그만두지 않겠다는 맹세를 받고 나서 남편과 자신의 지난날을 들려준다.
에드워드 담슨은 작가의 사상이 투영된 인물로 피터 쉐퍼는 에드워드의 입을 빌어 ‘연극’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말을 걸어온다. 조금은 극단적이고 광기에 사로잡힌 그의 작품은 언제나 클라이맥스만 집필될 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한 적이 없었다. 헬렌과 함께 하는 작업을 통해 완성한 첫 희곡 ‘우상들’ 전에는.
그리고 천재라는 찬사를 받을 만큼 문제작이긴 하나 좋은 작품을 써오던 에드워드 담슨은 점차 광기에 사로잡힌 강박관념을 작품에 풀어내 엄청난 비난과 실패를 겪게 된다. 그는 도망치듯 그리스의 산토리노 티라 섬으로 떠나온다. 그리고, 어느 날 그림처럼 아름다운 석양 속에서 절벽 아래로 실족하게 된다.
제일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젊은 에드워드 담슨을 연기하는 배우 박상원이였다. 연극의 중심축을 잡고 있는 헬렌 역의 김소희 배우가 든든히 받혀주는 가운데 자유분방하고 광기에 집착하지만 매력적인 에드워드 담슨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젊은 시절과 현재를 오가는 헬렌 김소희의 연기는 소름끼칠 만큼 자연스럽게 전환되어 흡인력이 무엇이지 알려준다.
젊은 시절 에드워드와 헬렌은 처음 그들이 함께 희곡을 작업하면서 쓴 한 장의 비밀스런 문서에서 영웅 페르세우스와 아름답고 용감한 아테나 여신이었다. 그러나 점차 두 사람의 관계가 삐걱거리며 더 이상 서로에게 닿아지지 않을 때에는 페르세우스는 점점 쇠퇴해가고 아테나 심술궂은 마녀가 되어버린다. 신화 속의 줄거리처럼 달라지는 두 사람의 관계가 안타깝다.
자신을 필요로 하는 존재였기 때문에 그의 곁에 있기를 선택한 헬렌은 그러나 더 이상 자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 남편을 보면서 지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처음에는 남편에게 오기를 부리는 듯 했으나 뒤로 갈수록 그녀는 자신의 마음에 들어오는 어두움과 싸우고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앙갚음하는 담슨의 복수는 옳지 않다고 여겼다. 아가멤논에게 복수를 한 클라이템네스트라는 옳지 않다는 신념을 지킨다. 그러나 담슨은 그 복수야말로 진정한 진실이라고 말했듯, 그의 내면에서 폭발하듯 터져 나오는 폭력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까지 ‘나는 당신을 용서하겠어!“라고 절규하는 헬렌은 애처롭고 한편으론 오싹하다. 감정적인 용서가 아닌 결단의 느낌이어서인지 피투성이 승리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솔직하게 말한다면, 당한대로 갚아주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옳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옳고 그름은 어디에서 누가 정한 것인가?
화려한 매체들 속에서 명맥을 유지해오는 연극을 두고 ‘영원히 죽지 않을 유일한 종교’라는 담슨의 신념처럼 정말 연극은 그러한가? 연극의 절대적인 가치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된다.
한 위대한 작가의 삶과 신념, 잡품을 통해 오히려 연극의 본질을 얘기하고 있다. 메두사의 머리를 자르면 한쪽에서는 치유의 피가, 다른 한쪽에서는 맹독이 나온다고 한다. 어쩌면 본질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양날의 검처럼, 동전의 앞뒷면처럼.
구태환 연출이 이끄는 올해 ‘고곤의 선물’에서는 박상원과 김태훈이 주인공 에드워드 담슨, 그의 아내 헬렌 역에는 2012년에 이어 다시 명품연기를 보여주고 있는 김소희, 아들 필립 담슨 역에는 김신기, 헬렌의 아버지 쟈비스 역에 고인배, 에드워드의 아버지 담신스키 역에 이봉규, 카티나 역에 김소영, 이밖에 신화를 재연함으로 극에 몰입도를 높여주는 이수형, 조유미, 노상원, 김대현, 강보미, 권형준, 오택조, 이민주 등이 함께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