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사랑에 스치다’는 연극 팬들의 폭넓은 지지를 받고 있는 서스펜스 수사극 ‘그놈을 잡아라’, 드림씨어터 컴퍼니의 작품으로 작년가을 초연에 이어 올 겨울 다시 관객을 만나고 있다. ‘그놈을 잡아라’의 작/연출인 정형석이 역시 작/연출을 맡았고, 박상철 작곡가가 20여곡에 이르는 작곡과 음악을 맡아 잘 만들어낸 감성 멜로 연극이다.
“사랑이 식었다고? 사랑이 국물이냐? 사랑이 국물이냐고!”
오랫동안 사귀어온 애인이 동창인 친구와 바람이 나더니 다음 달이면 결혼한단다. 소식을 듣고 과음을 한 동욱의 웃픈 대사이다. 소심하고 조금은 찌질한 그는 아버지를 거역하지 못해 연극배우의 꿈을 포기하고 고등학교 수학 선생님이 되었다.
은주는 여행가인 어머니와 공무원인 아버지의 결혼 생활이 행복해보이지 않아 독신주의자가 되었다. 그런 그녀도 혼자 짝사랑하던 선배가 있었고 그는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순간 다른 여자와 결혼한다. 그녀는 계약직 교사 기간이 끝나자 훌쩍 아프리카로 봉사활동을 떠난다.
갑자기 아버지가 돌아가신 윤희는 믿고 의지 했던 어른들에게 회복될 수 없을 것만 같은 깊은 상처를 받고 괴로워한다. 유일한 낙은 아버지가 좋아하던 올드 팝을 듣는 것뿐.
연극 ‘사랑에 스치다’에 나오는 인물들은 하나같이 아프다. 겁쟁이다. 그리고 외롭다. 변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 사람이라며 그렇게 아픈 사랑을 또 다시 품게 되는, 어리석어 보이지만 실은 다정함이 절실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정형석 연출의 자전적인 이야기가 녹아있어선지 잔잔하지만 조용한 울림으로, 음악을 타고 스며든다. 원치 않아도 스치는 바람처럼, 어느새 곁을 맴돈다.
믿고 의지했기에 사람이 주는 상처는 깊이가 보이지 않는다. 차라리 눈에 보이는 상처라면 아물어가는 것도 보일 텐데. 멀쩡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만신창이가 된 마음을 끌어안고 살아가는 것은 참으로 먹먹한 일이다. 어쩌면 그건 우리 모두의 모습이기에 이렇게 공감되나보다.
그래서 또 다시 아플지라도 누군가 필요한 지도 모른다. 스스로 벽을 쌓고 성을 세우고 철벽 방어를 쳤다 자신해도, 스치듯 다가온 따뜻한 말 한마디, 걱정해주는 다정한 눈빛에 허물어진다. 조금씩, 아주 조금씩. 허물어진 틈새로 보이는 이에게 주춤주춤 손을 뻗는다. 닿아지는 그 순간에 사라져버릴지도 모른다. 단단하게 세웠다 여긴 얼음성벽이.
열심히 약을 발라도 아물지 않는다. 상처란, 깊은 곳 어디서부터 나아야 하는 것이기에. 보이지 않는 그곳에 스며들어야 낫는 것이다. 그 때까지 기다려 봐야하지 않을까, 아프고 힘들지라도.
암전까지도 이야기 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장치처럼 따뜻하다. 기타와 비올라의 라이브 연주는 물론 때로 대사를 대신하는 음악도 감싸 안아주듯 다정하다. 극적인 반전이나 사건이 없어도 동욱과 은주, 윤희의 마음을 따라가다 보면 미소를 짓게 된다. 중간 중간 재치 있는 대사는 깨알 같다. 잔잔한 미소를 띠고 한없이 바라보게 되는 맑고 따뜻한 수채화 같은 작품이다.
소심해보이지만 단단한 책임감으로 윤희를 감싸 안는 좋은 선생님, 동욱 역에 초연에서도 안정적인 연기를 보여주었던 오동욱, 동욱의 새로운 인연,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준 은주 역에 박인지, 세상과 어른들로 인한 상처로 방황하는 윤희 역에 고보결과 문유빈, 수없는 역할들로 적재적소를 든든히 채워주는 멀티 맨에 양권석, 윤희의 친구들이자 기타와 비올라 연주까지 맡고 있는 김으로와 이예솜이 단단한 호흡을 보여준다.
잔잔하지만 긴 여운으로 남는 연극 ‘사랑에 스치다’는 오는 18일까지 대학로 설치극장 정미소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