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이 박힌 관.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그 관을 빠져나오는 마술을 보고 짐은 경이로움을 느낀다. 아니, 어쩌면 그는 아무것도 망가뜨리지 않고 온전히 빠져나올 수 있는 능력이 부러웠는지도 모른다. 그는 소중하지만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연극 ‘유리동물원’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뜨거운 양철지붕 위의 고양이’로 유명한 테네시 윌리엄스의 작품이다. 1945년 브로드웨이에서 개막한 이래 뉴욕 극평가상, 시드니 하워드상, 도널드슨상을 휩쓸면서 테네시 윌리엄스를 스타 극작가로 만들어주었다. 작가의 자전적인 이야기로도 유명한 이 작품은 경제 대공황으로 위기를 겪어야했던 1930년대를 배경으로 한 가족의 삶과 상처를 통해 현대의 우리 사회의 모습을 비추고 있다.
아버지가 남기고 간 축음기와 유리세공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을 돌보는 일로 시간을 보내는 로라. 직업을 갖게 하려고 아만다가 어렵게 보낸 대학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채 중퇴하고 만다. 아만다는 로라의 미래를 위해 톰에게 로라와 데이트할 남자를 한 명 데리고 오라며 종용하는데 결국 톰은 같은 창고에서 일하는 짐을 저녁식사에 초대한다.
과거의 아름다웠던 시절을 추억하며 살아가는 아만다와 수줍음이 너무나 많아서 친구도 사귀지 못한 채 자신만의 세계에 갇혀 사는 로라, 시인이 되고 싶은 꿈이 있지만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서 창고에서 일하고 있는 톰. 윙필드, 날개가 땅에 묶여버린 가족의 이야기이다.
두 명의 인물이 더 있다. 가족을 버리고 멀리 여행을 떠난 아버지와 암울한 삶을 비춰 주리라는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톰의 친구 짐이다. 아버지는 이 가족의 공통된 상처이며 그의 부재로 인해 세 인물은 더욱 자신만의 세계에 집착하게 된다. 짐은 ‘희망’이길 바랐으나 그 역시 위태로운 유리동물에 지나지 않았다.
‘은빛 유리구두 같은 달빛’에 소원을 빌라고하는 아만다. 그러나 그 소원이 이루어질까. 하필 그토록 깨지기 쉽고 햇살 한 조각에 사라져버리는 달빛에 소원이라니. 로라가 소중히 돌보는 유리세공으로 만들어진 동물들은 사실 인물들을 대변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연약한 그 손길이 아니면 위태롭고 빛이 없으면 스스로 빛날 수도 없는.
그래서 톰은 그토록 마술사가 부러웠던가보다. 손도 대지 않고 관을 빠져나오다니! 라는 그의 감탄은 어머니와 누이가 다치지 않게, 망가지지 않게 지키고 싶은 마음과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을 동시에 말하는 듯 보였다. 잃어만 가는 꿈을 향하고 싶은 열정과 치기 속에서도 그는 어머니와 누이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던 것이 아닐까.
그럴듯한 말을 늘어놓지만 사실 희미한 희망마저 산산이 부숴버리는 짐 또한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불안한 청춘이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1930년대의 그들과 2015년을 살아가는 현재의 우리는 다를 바가 없다. 여전히 유리 동물하나 가슴에 품고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지켜야하는 것이다. 그마저 잃으면 모두를 잃는 것이기에.
2014년 관객평점 9.2점, 객석점유율 97%로 화제가 된 연극<유리동물원>은 막을 내린 후에도 재공연 문의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섬세한 연출과 배우들의 호연으로 고전을 즐겁게 바라보게 만들어준 작품이 2015년 2월, 명동예술극장에 다시 올려졌다.
한태숙 연출이 암울한 현실을 담담하고 강렬하게 보임으로 보다 직관적으로 작품을 해석했으며 김성녀 배우가 아만다로 분하고 있다. 수다스러운 어머니, 옛날을 회상할 때는 수줍은 처녀의 모습을 보여주는 호흡이 일품이다. 섬세하고 여린 모습의 정운선이 로라 역을, 연극계의 신성, 이승주가 화자인 톰 윙필드, 그의 친구인 짐 역에 심완준, 사랑받았던 초연배우 전원이 함께한다.
위태롭지만 아름다운 ‘유리동물원’은 오는 10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