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메일전송
  • 기사등록 2015-05-04 11:24:14
기사수정

경사진 무대가 들어 올려지고 흔들리는 땅위에 더욱 불안하게 흔들리는 고목이 매달려있다. 삼켜버릴 듯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한 노인이 절규한다. 곁에는 충직한 하인과 그가 아끼던 광대가 있지만 고통은 오롯이 그의 몫이다.

‘리어 왕(King Lear:연출/윤광진)’은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 ‘오셀로’, ‘맥베스’등과 함께 4대 비극으로 일컬어지며 그 중 가장 심오하고 진지한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레어 왕(King Leir) 전설에 바탕하여 1605년에 셰익스피어가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리어 왕은 세 딸에게 누가 자신을 가장 사랑하는지 묻는다. 자신은 명예와 이름만 왕으로 남고 영토를 물려주려는 자리에서 거너릴과 리건은 마음에는 없는 화려한 언변으로 제 몫의 재산을 물려받지만 진실한 사랑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여겨 차라리 입을 다문 막내딸 코딜리어는 버림받는다. 코딜리어를 옹호하던 충직한 켄트 백작 역시 추방을 당한다.

두 딸은 이제 고약한 늙은이에 지나지 않는 리어 왕을 함부로 대하고 배신감에 몸을 떨며 리어는 폭풍우 치는 황야로 뛰쳐나간다. 한편 둘째아들 에드먼드의 음모로 큰아들 에드거를 오해했던 글로스터 백작은 결국 에드먼드의 배신으로 반역자로 몰리고 모든 것을 빼앗긴 채 두 눈까지 잃게 된다. 그제야 에드거에 대한 오해를 푼 그는 리어왕을 찾아 황야로 향한다.

‘사랑을 말로 다 할 수 있을까?’ 코딜리어의 독백은 곧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보려는 마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말로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는 그 상황을 모면하는 대신 진실을 담담히 내뱉는다. 그 때까진 그렇게나 사랑스럽던 코딜리어의 말에 리어 왕은 화를 낸다. 한번쯤 그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줬어야 하는 것일까?

마음에도 없는 소리로 얻어낸 것은 아마도 별 의미가 없나보다. 나라의 절반씩을 받은 거너릴과 리건은 리어왕에 감사하기는커녕 보필하는 기사가 너무 많다며 반으로 줄이라더니 어느새 한명도 필요없다고 말한다. 이미 귀찮은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두 딸의 변해버린 모습에 큰 충격을 받은 리어왕은 미쳐간다.

아닌 척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려도 손가락 사이 새어 들어오는 빛은 막을 수 없다. 딸들의 마음을 그는 정말 하나도 몰랐던 것일까? 그러나 진실을 외면한 대가라기엔 심한 벌을 받게 된다. 그런 그의 곁을 지키는 건 충직한 켄트가 변장한 모습인 심부름꾼과 광대 뿐. 한걸음 움직이기도 어려운 폭우 속에서 리어가 내뱉는 대사는 처연하기 짝이 없다.

광대의 촌철살인은 무거운 극 중에도 간간이 웃음 짓게 만들고 한사람도 물러서지 않는 배우들의 치열한 연기는 3시간의 러닝타임을 흥미진진하게 만든다. 특히 폭우 속에도 늙은 왕의 대사가 또렷이 들려오는 건 경이에 가까웠다. 배신당한 인간의 처절한 슬픔과 광기, 야망에 몸을 내던지고 자기 것이 아닌 것을 탐내고 서로를 경계하는 인간의 시커먼 밑바닥을 셰익스피어 특유의 시적 언어로 들을 수 있다. 직접 번역한 연출 윤광진의 노력이 작품을 지금의 시대까지 아우르게 만드는 강력한 힘이 되었다.

황야. 거칠고 메마른 황량한 땅에서 리어도, 글로스터도, 에드거도, 그들의 수하도 모두 진실을 대면한다. 리어왕을 구하고자 달려온 코딜리어의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생을 마감하는 리어의 모습은 슬픔보다 숙연한 느낌이 든다. 두 사람이 화해한 것은 다행이지만 삶은 결코 만만하게 봐주는 법이 없다. 치열하게 쟁취해야만 하니까.

위엄 있는 왕에서 황야를 휘젓고 다니는 미치광이 늙은이까지 기막히게 오가는 배우 장두이와 곁에서 의미심장한 대사들을 마구 뱉어내는 광대 이기돈, 충직한 켄트 역에 이동준, 관능적이고 욕심많은 첫째 딸 거너릴 역에 서주희, 냉정하고 이기적인 둘째 리건 역에 이영숙, 진실한 셋째 딸 코딜리어 역에 서은경, 아들에게 배신당하는 충성스런 글로스터 백작에 조영진, 동생의 계략으로 거지로 살지만 끝내 자신의 자리를 찾는 에드거 역에 이갑선, 증오로 불타오르는 남자 에드먼드 역에 오동식, 이밖에 이윤재, 유상재, 송의동, 김성환, 홍아론, 이승헌, 송호진이 시대를 관통시키는 명작 <리어왕>을 보여준다. 오는 10일까지 명동 예술극장.

0
기사수정

다른 곳에 퍼가실 때는 아래 고유 링크 주소를 출처로 사용할용해주세요.

http://www.hangg.co.kr/news/view.php?idx=24397
기자프로필
프로필이미지
리스트페이지_R001
최신뉴스더보기
리스트페이지_R002
리스트페이지_R003
리스트페이지_004
모바일 버전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