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이자 6.25전쟁이 발발한 지 65년이 되는 올해 국민들이 호국 영웅들을 기리는 호국영웅 알리기 위한 프로젝트를 정부는 추진하고 있다. 6월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호국영웅들의 활약을 소개하고 숭고한 희생정신을 살펴본다.
김홍일 육군 중장은 1989년 9월 평안북도 용천군 출생으로 오산중학교를 졸업한 뒤 조국의 독립투쟁을 위한 큰 뜻을 품고 중국으로 건너가, 1920년 중국 귀주강무학교 졸업 후 소위로 임관해 1944년 중국청년군사대리참모장을 지낸 후 1945년 4월 한국광복군 참모장으로 항일무장 독립운동의 선봉에 섰다.
1948년 8월 귀국 직후 육군사관학교 교장, 시흥지구 전투사령관, 제1군단장 등을 역임했다. 김홍일 중장은 6.25전쟁 당시 풍전등화의 대한민국을 지켜내는데 전공을 세운 인물이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고 3일 만에 북한군이 서울까지 진격해 들어오자 국군은 속수무책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시흥지구전투사령관으로 임명된 김홍일 장군은 후퇴하던 국군을 결집해 3개의 혼성사단을 편성하고 한강 이남 24km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김홍일 장군의 진두지휘 아래 국군은 노량진-영등포 일대와 신사리-말죽거리 일대에서 도하하려는 북한군을 저지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다. 일주일간 치열했던 한강 방어선 전투는 비록 적의 전차 부대에 밀려 후퇴로 끝났지만 초기 전세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수도권의 국군 주력을 초반에 섬멸하려던 북한군의 작전 계획에 일대 차질을 가져왔고, 시간적인 여유를 확보함으로써 국군의 전략적 후퇴와 미 지상군의 참전 등 차후 작전을 위한 전기를 마련했다. 한강 방어선이 붕괴된 후 국군과 유엔군은 금강과 소백산맥 일대에 새로운 저지선을 형성했다.
제1군단장에 오른 김홍일 장군은 예하의 제2사단 16연대와 제25연대, 독립 제17연대를 지휘해 진천 남쪽 봉화산-문안산 일대에서 전차와 포병으로 증강된 북한군 제2사단의 남침을 5일 동안 저지해 적에게 타격을 입혔다. 또한 7월 15일 독립 제17연대는 화령장 북쪽에 매복 작전을 펼쳐 속리산으로 남하해 상주로 침공하려는 북한군 선두부대를 궤멸시켰다.
제1군단 예하의 제8사단은 안동 북쪽 일대에서 북한군 제12사단의 침공을 저지하던 와중에 서쪽 풍산지역으로 침공하는 북한군 제8사단과 동쪽 배후에 침투해오는 북한군 유격대에 맞서 싸우면서 나흘 동안 방어전을 전개했다. 이 전투로 북한군의 안동 지역 진출이 지연됐다.
의성으로 철수한 뒤에는 북쪽 향로봉 일대에 주저항선을 형성해 국군이 보현산과 기계지역 정면에 새로운 주저항선을 형성할 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 낙동강전선으로 철수하며 방어에 돌입한 후에는 기계-안강-영덕-포항 일대에 침공해온 북한군을 격퇴시켰다.
이 전투로 북한군 2개 사단은 낙동강전선의 동부지역 돌파작전에 실패했고, 제1군단은 기계와 포항지역 북방으로 후퇴한 북한군을 추격해 다음 단계의 반격작전을 펼칠 수 있었다.
이처럼 김홍일 장군은 불리한 전력과 전세에도 북한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반격으로 전환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이후에는 육군종합학교 총장으로 취임해 전시에 급격히 소요가 증대되는 육군 간부의 양성에 전념하다가 1951년 3월 육군 중장으로 예편했다.
“부하를 사랑하라. 평소에 고락을 함께하지 않은 부하는 전장에서 생사를 같이할 수 없다. 청렴결백하라. 재물을 탐하면 군인으로서의 명예를 잃을 것이다.”
그는 사관생도들에게 항상 이 말을 강조했다. 일제 치하에는 중국에서 광복군 참모장 등으로 활동하며 무장 항일 투쟁을 전개하고, 광복 후에는 풍부한 경험과 탁월한 지휘력을 바탕으로 전란에 휩싸인 조국을 위해 싸운 그는 진정한 군인이었다./글.사진-문화체육관광부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