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한국관광공사
[김칠반 기자]#율곡 이이(1536-1584)
이 곳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이며 경세가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 선생의 유적지 이다. 선생의 아명은 현룡(見龍), 자는 숙헌(叔獻), 호는 율곡(栗谷).석담(石潭).우재(愚齋), 본관은 덕수(德水)로 아버지 이원수(李元秀)와 어머니 신사임당(申師任堂) 사이에서 출생했다.
어머니인 신사임당이 율곡을 낳던 날 밤 검은 용이 바다에서 침실로 날아와 아이를 안겨주는 것을 보았다하여 어릴적 이름을 현룡(見龍)이라 하였고, 태어난 방을 몽룡실(夢龍室)이라 부르고 있다. 그의 생애에 관련이 깊은 지역이 세 곳이 있는데, 첫째는 그가 태어난 외가가 있었던 강릉 오죽헌이고, 둘째는 처가가 있던 황해도 해주의 석담, 그리고 셋째는 덕수이씨 가문의 세거지이면서 그가 성장했던 파주의 율곡리이다. 특히 그의 혼 율곡은 율곡리에서 유래된 것인만큼 그의 생애에서 파주와의 관련성은 대단히 크다 할 수 있다.
선생은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해 3세에 글을 읽었고, 1543년(중종 38년)인 8세때 ‘화석정시(化石亭詩1)와 1545년 10세때 ’경포대부(鏡浦臺賦)‘를 지었고, 1548년(명종 3년) 13세의 어린나이에 진사초시에 합격했다. 1551년 16세때 모친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른 후 금강산에 들어가 불서를 연구하다가 1년만에 하산해 ’자경문(自警文)을 지어 공부에 전념했고, 1557년(명종 12) 성주목사 노경린의 달과 결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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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61년 부친상을 당하고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장원한 이후 모두 아홉차례에 장원하여 구도장원공으로 불렸다. 1564년 호조좌랑이 된 것을 시초로 대사간, 대사헌, 대제학, 형조.병조.이조판서 등 요직을 두루 역임했다.
율곡 선생의 학문은 현실해결을 중시하는 실천적 학문으로 조선 유학계의 영남학파의 거두인 이황(李滉)과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학자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형성주도해 조선시대 성리학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율곡의 이러한 학문경향은 정치.경제.교육.국방 등에 걸쳐 구체적인 개선책을 제시해 경세가로 큰 업적을 큰 업적을 남겼다. 당쟁의 조정, 10만 대군의 양성, 대동법, 사창실시 등 사회정책에 대한 획기적인 선견은 조선후기 실학자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 1584년 (선조 17년)음력 1월 16일 49세의 나이로 별세해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 자운산 기슭의 선영에 예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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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로는 ‘학교모법’ ‘성학집요’ ‘격몽요결’ ‘소학집주’ 등과 이를 집대성한 ‘율곡전서’가 있다. 1624년(인조 2) 문성(文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졌고, 16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됐다. 해주 석담의 소현서원, 파주의 자운서원, 강릉의 송담서원 등 전국 20여 개 서원에 제향됐다.
# 신사임당(1504-1551)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예술가이자 현모양처의 대명사로 알려져 있고, 파주시 법원읍 동문리에 묘가 있다. 사임당은 당호이며 본관은 평산(平山), 아버지(命和), 어머니는 용인 이씨 사온(思溫)의 딸이다. 외가인 강릉 북평촌에서 태어나 성장했고, 19세에 덕수이씨 원수(元秀)와 결혼했다. 결혼 몇 달 후 아버지가 죽자 친정에서 3년상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후 시가의 선조때부터 터전인 파주 율곡리에 기거하기도 했고, 때로는 친정인 강릉에 가서 홀로 사는 어머니의 말동무를 해드렸다. 이런 와중에 셋째 아들인 율곡 선생을 강릉에서 낳았다. 38세 되던 해에 시집살림을 주관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와 수진방(현 청진동)에서 살다가 48세에 삼청동으로 이사했다. 같은 해 남편이 수운판관에 임명돼 아들들과 함께 평안도에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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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임당의 뛰어난 예술가로서의 재능은 일찍부터 나타나 7세에 안견(安堅)의 그림을 스스로 사숙하기도 했다. 그의 주된 그림소재는 풀벌레, 화조(花鳥), 매화(梅花), 난초(蘭草), 산수(山水) 등으로 이런 화제(畵題)를 통해 나타난 그림은 마치 생동하는 듯한 섬세한 사실화였다.
그림 뿐만 아니라 글씨와 시 문장에도 주위의 격찬이 끊이지 않았고, 조선시대의 예술방면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렇듯 교양과 학문을 갖춘 예술인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은 자신의 천부적인 재능과 함께 그 재능을 발휘할 수 있는 집안의 환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현명한 어머님의 가르침과 도량 넓은 남편을 만난 점 등은 그의 재능에 힘이 되었고, 그러한 인간애는 자식사랑으로 이어졌다.
자녀들 가운데 그의 훈화와 감화를 제일 많이 받은 이는 셋째 아들 이(珥)로 훗날 이이는 어머니 사임당의 행장기를 저술했다. 여기서 어머니의 예술적재능, 우아한 성품, 정결한 지조 등을 소상히 밝히고 있고, 또한 넷째 아들 우(瑀)와 큰 딸 매창(梅窓)을 자신의 재주로 계승한 예술가로 키웠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자어리도> <산수도> <초충도> <연로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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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운서원
유적지내에는 율곡 선생을 비롯한 가족묘역과 선생의 위패를 모신 자운서원이 자운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가족묘역에는 율곡 선생과 부인 곡산노씨묘를 비롯해 부모인 이원수와 신사임당 합장묘, 선생의 형 이선 묘, 아들 이경림 묘 등이 중심묘역을 이루며 그 외의 가족묘 등 모두 14기가 조성되어 있다.
자운서원은 조선 광해군 7년(1615)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어 효종 원년(1650) ‘자운(紫雲)’이란 현액을 하사받은 사액서원으로 숙종 39년(1713)에 선생의 제자인 김장생(金長生)과 박세채(朴世采) 선생을 추가로 모셨다. 고종 5년(186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없어졌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다.
이 서원은 조선 광해군(光海君) 7년(1615)에 조선 중기의 대학자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지방유림들로 인하여 창건되었다. 효종(孝宗) 원년(1650)에 '자운(紫雲)'이라 사액을 받았으며, 그 뒤 숙종(肅宗) 39년(17B)에 그의 후학인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1548∼1631)과 현석(玄石) 박세채(朴世采 1632∼1695) 두분을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그러나 조선후기인 고종(高宗) 5년(1868)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빈터에 묘정비(廟庭碑)만 남아 있다가 1970년 유림의 기금과 국가지원을 받아 복원하였고 1973년 경내 주변을 정화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팔작지붕으로 된 사당(祠堂)과 삼문(三門) 등이 있으며 담장 밖에는 묘정비(廟庭碑)가 세워져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규모이며 높은 대지위에 세워졌다. 최근에 사당 전면에 강당과 동재, 서재, 협문, 외삼문을 신축하고 주변을 정비하였다. 사당 내부에는 이이의 영정을 중심으로 좌우에 김장생과 박세채의 위패를 모셨으며 매년 음력 8월 중정에 제향을 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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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운서원묘정비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 廟庭碑)는 자운서원의 역사를 적은 비로 자운서원의 자운문 밖 우측에 위치해 있다. 이 비는 자운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선생의 학덕을 기리는 한편 자운서원의 건립내력을 기록하고 있다.비의 받침돌은 2단으로 이루어졌는데 아랫단은 두꺼운 판석 4장으로 짜 맞추어지대석(地臺石)을 만들고 그 위에 사각의 비좌(碑座)를 놓았는데 복련문(覆蓮紋)이 새겨져 있으며 측면에는 연주문(蓮珠紋)과 괴운문(怪雲紋)이 조각되어 있다.비문은 예서체로 되어있는데우암 송시열(尤庵 宋時烈)이짓고 당대의 명필인 곡운 김수증(谷雲 金壽增)이 썼으며비명은 김수항(金壽恒)이 썼다. 비의 상단에 ‘자운서원 묘정비(紫雲書院廟庭碑)’라는전액(篆額-머리글)이 쓰여져있으며 비문 끝의 ‘숭정56년계해(崇禎五十六年癸亥)’라는 연기로 보아 비의 건립연대가 숙종 9년(1683)임을 알수 있다.
# 율곡이이신도비
율곡이이신도비는 자운서원 경내의 좌측 산기슭에 세워져 있는데 조선 중기 대학자인 율곡 이이(栗谷 李珥, 1536~1584)선생의 일대기를 기록한 비이다. 이신도비는 율곡선생이 돌아가신지47년이 지난 인조 9년(1631) 4월에 건립된 것으로 비문은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신익성(申翊聖)이 썼으며 전액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비의 재질은 대리석으로 앞뒷면에 걸쳐 각자(刻字)되어 있는데 앞면에 몇 군데의 총탄 흔적이 있다. 비의 규모는 높이 223cm, 너비 109cm, 두께 39cm이며 현재 비각을 지어 보호하고 있다.